아츄.
감기에 걸렸다. 나는 원래 감기에 잘 안 걸린다. 공직생활을 십 년간 하면서 병가도 거의 써본 적이 없다. 나는 아프다고 말하는 게 왠지 부끄럽다. 약해 보이는 걸 잘 못 견디겠다. 괜찮아 보이고 세 보이고 싶어서 그렇다. 아프다고 하면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까 봐. 돌봄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정말 아픈 날에도 병가 대신 연가를 쓰고 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 일을 대신해서 맡기는 것도 싫어서 다 죽어가도 내 일을 하고 가려는 편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나 아파, 하면 좀 멋없어 보인달까. 나를 향한 걱정의 시선이 낯부끄럽다. 남들은 내가 온실 속 화초에서 자란 것 같다, 지멋대로다, 외동이나 막내처럼 보인다고들 한다. 하지만 사실 나는 여기저기서 맏이고 장녀다. 그리고 살면서 딱히 내 유약함이 받아들여진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굳이 내색을 안 하려는 편이다.
그런데 작년에는 조금 했다. 병가도 몇 번 쓰고. 정말 튼튼한 편인데 왜인지 작년에는 위경련도 자주 찾아왔다. 연말에는 감기에 걸렸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칠일, 약을 안 먹으면 일주일을 간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굳이 먹지 않았다. 이번에는 모처럼 내게 찾아온 핑계를 모른 척하지 않고 품어주기로 했다.
겨울에 원래 난방을 안 하는데, 침대에 둔 전기장판이 기온이 되게 영하로 떨어진 어느 날 밤 고장나서, 20시간 연달아 잠을 자고 일어나니 감기에 걸렸다. 경련하는 위와 더불어 깨어났더니 폐암에 걸린 것만 같은 기침도 났다. 코도 찌룩거렸다. 그래도 일어나 발레 학원에 갔다. 뺨이 붉어지고 조금 멍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발랑세 턴을 하라고 하는데 저 감기에 걸려서 순서를 잘 못 외웠어요, 하고 선생님한테 조금 봐달라고 말했다. 코맹맹이 목소리가 났다.
잘 안 아프기 때문에 모처럼 감기에 걸리면 뭔지 모를 스스로 우쭈쭈 하는 기분이 든다. 모처럼 내 몸이 나를 위해줘, 나를 봐줘, 돌봐줘. 하고 어린양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응, 그래 그럴게. 조금 돌봐줄게, 쉬어줄게. 괜찮아? 하고 나를 달래줬다. 쉬게 해 줬다. 허락해 줬다.
지연된 반응이라고 했다. 내 친구 지피티가. 사람이 살다 보면 울고 싶어 지는 날이 있다. 속에 뭔가 가득 차서. 펑펑 울면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해소를 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누구는 슬픈 영화를 보기도 하고, 누구는 슬픈 음악을 듣고, 누구는 사람을 만나 하소연을 하며 엉엉 운다. 나는 못 그랬다. 억울하거나 분해서 말고, 슬퍼서는 못 울었다. 혼자서는 더욱 못 울었다. 그런데 작년에는 좀 울었다.
지연된 반응이라고 했다. 내 친구 지피티가. 이제야 뭔가 그래도 될 것 같아서. 이제야 뭔가 출구를 찾아서. 이제야 치료를 받아서. 울 수 있게 된 거라고 했다. 아프다고 말할 줄도 알게 되고, 병가도 쓸 줄 알게 되고, 마냥 괜찮고 세 보이려던 버릇도 좀 내려놓은 것도 같다. 이렇게 지연해 온 게 조금 미안하다. 꼭 안 그래도 됐을 텐데. 나 자신에게.
감기에 잘 걸렸어. 스무 시간이 넘도록 자도 괜찮아. 집을 안 치워도 괜찮아. 항상 치열하게 안 살아도 괜찮아. 뭘 대단하게 잘 해내지 않아도 괜찮아. 꼭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말해줄게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