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교
우리 부서에서 나는 가장 말단 검사실의 가장 어린 유일한 30대 계장으로, 모두가 기피하는 변호사 시험 감독관으로 차출당했다. 내일 아침 7시 50분까지 시험장에 도착해 저녁 7시 30분까지 근무해야 하고, 인생이 걸린 시험이기에 종이 1분 일찍 울리기라도 하는 등 사소한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수험생들에게 각종 소송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데다가, 근무 시간대비 수당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는 일이다.
결국 각 부서 배정 인원이 강제로 할당되었고 내가 속한 부서는 노인정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가장 막내인 내가 가게 되었다. 근무장소는 무작위였으나 우연히도 나의 모교 왕십리 소재 공대로 유명한 대학으로 지정되었다. 집에서 대중교통이든 자차로든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거리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강을 건너야 하므로 인근에 방이라도 잡아야 할지 고민이다.
09년 3월에 입학해 같은 달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4학년때까지 내내 같은 사람과 연애를 했다. 남자가 70퍼센트인 학교에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생활했다. 신촌에 있는 학교가 와인이 어울리는 분위기였다면 우리는 왠지 막걸리가 어울리는 학교였다. 선배들은 시집을 끼고 통기타를 매고 다니고, 내가 속한 인문대는 가난과 열정과 패기가 넘실거리는 곳이었다. 국문과는 굶는 과라고 했다. 우리는 푼돈을 모아 왕십리 곳곳의 허름한 술집을 드나들었고, 커다란 피처에 담긴 체리 칵테일 소주가 7천 원 밖에 안 하면서도 엄청나게 맛있던 술집을 자주 가곤 했다. 그 술집 벽에 빼곡히 적힌 낙서 중에는 나와 내 남자친구 이름이 있었고, 그 사이에는 하트 모양을 그려놨었다. 그 낙서가 아직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떤 교수님은 강의 도중 시를 읊다가 즉흥적으로 우리를 언덕으로 데리고 나갔다. 교수님은 강의 자료에 활자로 인쇄된 지식 대신 화창한 날씨에 깃든 낭만을 젊은 우리의 가슴속에 불어넣어 주셨다. 그곳에 있던 우리 중 누군가는 법조인이 되었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는 언론인이 되었고, 누군가는 정치를 하게 되었고, 누군가는 글을 쓰게 되었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다. 스무 살 남짓했던 그 시절의 우리는 각자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귀했고 예뻤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숨은 가능성들이 제멋대로 반짝였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지대가 높고 경사가 가팔랐다. 인문대는 특히 그랬다. 158 계단, 정력계단이라 부르던 계단들이 있었다. 나는 항상 높은 힐을 신고 다녔다. 예뻐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 높은 힐을 신고 가파른 경사를 매일 오르다 무릎이 나가서 병원에 다녔다. 그때 아팠던 오른쪽 무릎은 요즘도 간혹 아프다. 꽃이나 리본이 달린 유치한 머리띠도 하고 다녔다. 그로부터 십사 년이 지난 내일 다시 학교에 간다. 편한 신발을 신고 편한 옷을 입고 유치한 머리띠 같은 건 안 하고 갈 것이다. 캠퍼스에는 여전히 한겨울 추위를 뚫는 싱그러움이 있을 테고, 아직 피어나지 않은 숨은 가능성들이 넘실댈 것이다. 나는 분명 그게 부러워지겠지. 내 것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