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주체
이상하게도 나의 연애사는 보편적 연인들이 흔히 그렇듯 상대가 또래 연상인 경우가 별로 없었다. 강제 연애로 열 살이란 극단적 나이차 한 번만 제외하면, 주된 상대는 동갑, 그리고 가장 장기간이었고 빈번했던 상대는 연하였다. 내가 특별히 어린 남자를 선호하는 것도 아니고, 오글거려 잘 부르지 못하는 병이 있긴 하지만 나도 보편적인 여자들처럼 애교스럽게 오빠라는 호칭을 쓰며 연상의 남자에게 의지하는 연애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딱히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 특이사항에 대해 내 최측근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가 연하 위주로 연애를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지. 보통 연하남이 연상의 여자를 만나는 이유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의지를 하려는 목적이 주될 것 같아서, 나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도 않고 정작 연애를 하면 연하들이 데이트 비용을 자발적으로 많이 썼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한 연상의 여자로서 의지가 되어서일까요? 하고. 내 최측근 사람들은 단호하게 그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아무 짝에도 의지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런가 싶었다.
연애 관계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한 인간으로 보았을 때 사실 나는 꽤나 의지할 법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스스로 이르렀다. 꽤 많은 사람들이 고민이라든지 힘든 상황을 들고 찾아와 내게 꺼내 보인다. 먼저 상황을 조장하거나 묻지 않아도 그렇다. 내가 평소에 살갑거나, 고민 상담에 적절한 사람처럼 보이거나, 조언을 잘해줄 것처럼 보이거나, 따뜻한 품을 내어줄 것 같은 인상이 아니라는 점은 나를 아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경우, 이런 것까지? 싶은 본인의 깊고 연약한 속사정을 내게 가지고 올 때가 있다. 그런 경우 나는 말을 아끼고 상대의 말을 들으며 우선 생각을 한다.
나는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 내 앞에서 힘들어하는 이에게 당장의 듣기 좋은 위로나 따스한 공감 같은 건 누구나 해줄 수 있는 부분이므로 역설적으로 나는 그런 부분을 가장 먼저 생략해 버린다. 내가 도덕적 우위의 입장에 선다거나 어떤 심판자가 되어 정답과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도 않는다. 물론 떠오르는 것들은 있지만 쉽사리 하지 않는다. 상대를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상대를 책임 있는 어른으로 대우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대신 질문을 한다. 상대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애써 직면하고 싶지 않아 보이는 부분에 대해, 분명 불편해할 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굳이 꺼내 물어본다. 사실 본인이 가장 정확하게 답을 알고 있다. 타인에게 고통의 서사를 털어놓을 때, 종종 그 이면에는,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부분을 모르는 척 덮어줘, 공범이 되어줘, 왜냐면 내가 이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야. 하며 본인이 져야 할 책임을 일부 유기하려는 시도가 은밀하게 섞여 있기도 하다.
당사자성(當事者性)이란 특정 법률관계나 분쟁에 관하여 권리·의무가 직접 귀속되는 주체로서 그 사건의 결과를 법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지위다. 핵심은 직접성 : 권리·의무가 직접 걸려 있는가. 귀속성: 결과가 그 사람에게 법적으로 돌아가는가. 책임성: 판결·합의·결과를 피할 수 없는가.이다. 참고인, 제3자, 증인 등이 의견을 내고 개입을 할 수 있을지언정 판결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최종 판단과 그에 따른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이다.
우리는 때로 당사자성이 요구되는 사안을 제3자에게 이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마주할 현실이 무겁고 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에서는 실제 어떤 행동을 하는 작위뿐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무작위의 형태까지도 책임의 대상이 된다. 결과 발생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위험 경로를 유지하는 것은 미필적 고의에 기반한다. 나는 그런 비겁을 잘 용납해주지 않는다. 상대가 겪고 있는 고통의 질감과 무게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거울을 보여주고 당사자의 지위로 복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른이므로,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스스로 마주하고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