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꿈 속이었고, 그것도.
나는 평소 욕을 안 한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와서인지 모르겠지만 상스러운 말을 잘 하지 않고 고운 말만 쓰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찍 조사가 예정된 나와 생일이 같은 사기꾼 여자는 나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다. 얼마나 염치가 없는지 기록을 검토하는 내내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피해자들의 심정에 마음이 답답해서 다음날 아침 이 년을 내 앞에 앉히면 절대 물 한 잔도 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나는 아침잠이 많고 오전에는 잠이 덜 깬 상태이므로 조사 시간을 항상 오후 2시로 고정하곤 하는데, 이 년이 오전을 고집해서 내 기준 꼭두새벽인 오전 10시에 오겠다고 했다.
경험이 많지 않을 때는 조사 일정을 잡고 몇 주 전부터 날을 새 가며 준비를 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한 자신감이 생긴 나는 평소 습관이 나왔다. 궁지와 벼랑 끝에 몰릴 때까지 최대한 미루고 놀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시작하는 습관이다. 그래서 오전 10시 새벽 조사(내 기준) 준비를 전날 오후 4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부장님이 달력에 적혀있는 조사 일정을 보시고 내게 조사 준비는 안하냐고 물어보시고, 앞자리 계장님은 내 책상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기록을 보시고 준비할게 참 많아보이는데 언제까지 놀거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들의 염려를 외면하며 오후 4시까지 핸드폰을 가지고 놀았다.
뒤늦게서야 시작한 조사 준비는 밤 11시까지 이어졌고, 그 시간에도 늘 그렇듯 등 뒤 벽에서는 부장님의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기록에 몰입해 종이가 닳도록 넘겨보며 혐의를 뻔뻔하게 부인하는 그 년의 모가지를 탁 칠 수 있는(나 말고 다른 사람의 표현)다양한 탄핵자료를 확보했다. 나름대로 예리한 질문들을 꾸려 조서 초안 수십 페이지를 작성했고, 밤 11시 이후에는 초과수당이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11시가 되자마자 냉큼 마무리했다. 그리고 선량한 우리 부장님께 내일 조서 초안인데 이 정도면 될지 검토 부탁드린다는 메시지와 함께 파일을 첨부해서 보내놓고 퇴근했다.
검사는 초과 수당이 따로 없음에도 매일 늦은 시간까지 근면 성실하게 일하시는 부장님께서는, 내가 그 야심한 시간에 던져놓고 퇴근해버린 조서 초안을 꼼꼼히 검토해 주신 후 수정본을 돌려주셨다. 오늘 아침에 출근해 우리 부장님이 내게 회신해 주신 시간을 보니 새벽 1시 6분이었다. 부장님은 평소에 밤 11시쯤 퇴근하신다. 내가 고의로 부장님을 착취한 것은 아니다. 부장님께서 원래 그런 분이시라는 건 알고 있긴 하지만.
그 년은 워낙 여러 명의 피해자들에게 비상식적이고도 비현실적이면서도 양심과 염치라고는 찾아볼수가 없는 사기를 치고 다녀서, 단순한 범죄 사실을 확인할 것만 수 페이지에 이르렀으므로 조사가 한두 시간 만에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내게 오전에만 시간이 가능하다고 했기에, 나는 아무리 악감정에 치를 떨지라도 피의자의 개인 사정을 고려해 주는 선량한 수사관이므로 전화를 걸어 예상 조사 소요시간이 길어질 수 있음을 고지하고, 가능여부를 물었다. 그 년은 내게 일정 조정을 요청했다. 그래서 일정을 변경했고 결론적으로 내겐 점심 낮잠 시간이 생겼다. 회사 여자 휴게실 가장 안쪽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십 년인가 이십 년인가 얼마나 긴 기간 동안 반복된 것인 지는 모르겠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겪는 일이다. 꿈속에서 나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어떤 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가 요청한 도움이 큰 수고나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간곡하게 부탁하는 내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며 내가 잡은 손을 놓고 가버렸다. 사실 그 사회적 상황은 좀 우습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겨울왕국 공연을 준비하게 됐고, 엘사 역을 맡게 됐다.
내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엘사 동생 안나 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평소 습관대로 나는 궁지와 벼랑 끝에 몰릴 때까지 준비를 미뤄오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의상은 어디서 구할지, 메이크업은 어디서 할지, 다른 출연진들과 공연의 전체적인 합은 어떻게 맞출지를 같이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같은 공연을 하니까. 하지만 안나 역을 맡은 그 친구는 본인 포함 다른 사람들과 모든 게 다 준비된 상황에서 내게 공유해 주기 힘들다고 했다. 이미 다 맞춰놨다고 했다. 다른 이들과도 나는 공유하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같은 공연을 해야 하는데, 나는 혼자 어떻게 준비하고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해졌다.
그러다 잠이 깬 것이다. 잠이 깼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또 그게 찾아왔다. 내 두 발을 잡고 출구 어디론가로 거세고 거칠게 빨아당기는, 나는 가기 싫어서 몸부림치는데 그 무서운 힘은 나를 휩쓸어가려고 하고 나는 아무리 힘을 줘도 무기력하게 질질 끌리고 빨려가는 그 장면이 또 덮쳐왔다. 그 추락 비슷한, 더 불쾌한 질질 끌려가는 느낌을 충분히 겪고서야 나는 두 번째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니까 이미 한번 깼다고 생각한 것도 꿈이었고 그 사이에 가위 비슷한 것을 겪었고 그 이후에 진짜로 깨어난 것이다. 생생한 공포감을 온몸에 잔뜩 묻히고 사무실로 자리로 돌아왔다. 부장님은 아직 잠이 덜 깬 내 얼굴을 보고 그 년은 언제 오기로 한 거냐고 물어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