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노무의 늪
요 몇 주간 왜 도무지 살아있는 느낌이 안 드는가 싶었다. 오늘 복합기 앞에서 영혼을 잃어버린 채 영수증 수백 장을 한 땀 한 땀 스캔하던 중 마침내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근 열흘간 사건 기록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었다. 부장님께서 이 사건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기를 희망하시기 때문에 나는 3년 치 수천 장 영수증 무더기에서 증거를 뒤지는 작업만 무한히 지속해야 했다. 차라리 흉악범을 불러다 조사를 하거나, 아주 어려운 사건의 내용을 파악해서 검토보고서를 쓰는 일을 했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인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을 것 같다. 고소를 하려면 증거를 선별해서 보내줄 것이지 3년 치 영업 영수증을 박스째 보내버리면 수사 인력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이곳에서 어느 세월에 이걸 다 정리해서 범죄일람표를 만들 라건지 창문 밖으로 박스를 거꾸로 뒤집어 영수증을 다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간 내가 들인 품을 생각하면 이 사건의 피의자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아도 부족하다.
나는 단순 행정 업무가 진절머리나게 싫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 우리 엄마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이다. 어릴 때 엄마가 근무하는 학교 행정실에 가본 적이 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향기로운 자스민티 향이 공간에 가득 차 있었고 물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 나며 난방이 잘 되어서 따뜻하며 한적해보였다. 그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결코 내가 이쪽 업무를 할 일은 없겠다고.
그 평화로움이 숨막히게 단조롭게 느껴졌다. 검찰 직렬 시험을 보면서 일반행정직 공무원 시험도 함께 봤다. 양쪽 다 합격을 했었다. 일반행정직은 시험을 볼 당시부터 근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엄마의 권유 때문에 함께 봤을 뿐이었다. 치열한 과정이 있고 그에 따른 승패가 있고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그 과정에서 가슴이 뛰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회사가 조만간 쪼개진다. 공소청과 중수청으로. 설문조사에 따르면 90퍼센트에 가까운 우리 조직 구성원들은 공소청을 희망한다. 공소청에 근무하면 더 이상 수사관이 아니게 된다. 검사를 보조하는 행정직 공무원일 뿐이다. 중수청은 근본도 없는 짬뽕 조직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공수처 꼴이 날 수도 있다, 나중에 정권이 바뀌면 경찰에 통폐합될지도 모른다, 중요범죄만 담당하기 때문에 기존 우리 기피부서인 특수부처럼 한평생 수사 노예가 되어 고생만 할 것이다. 등등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주변에서는 이다음에 중수청이 출범하면 나를 중수청 홍보대사로 임명해줘야 한다고 한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희망하는 것도 모자라 사람들에게 같이 가자고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을 뛰어다니며 일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잠복근무를 하며 차에서 짜장면도 먹고 싶다. 평소엔 짜장면을 거의 먹진 않지만 왠지 차에서 잠복근무를 한다면 짜장면을 먹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전에 고액벌금을 미납한 수배자의 행방을 찾기 위해 검거 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아주 간단하게도 독서실에 수배자가 있는지 찾아보는 역할이었다. 계장님이 급하게 공수해 오신 엑셀 책을 옆구리에 끼고 공부하러 간 학생인 척만 하면서 염탐하는 단순한 임무였다. 그런데 그의 엄청난 고액 미납 금액이 떠오르자 별 연기도 필요 없는 내 발걸음이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혹시라도 정체를 들켜서 수천만 원 벌금 미납 수배자가 도주해 버리면 일을 망치게 될까 봐 몹시 긴장을 했었다. 그건 굉장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수배자가 집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나온 연기를 한 적도 있다. 누가 봐도 수사관 느낌이 드는 덩치 큰 남자들에 비해 긴 생머리에 여리여리한 체형을 가진 나는 전혀 수사관스럽게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부장님은 중수청에서는 마약사범들도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은 사무라이 장검을 차고 다녀서 그곳은 피가 난무하는 전쟁터일 거라며 겁을 주셨다. 마약사범들이 약에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긴 하겠지만 그들이 장검을 대체 어디서 구한다는 건지 의문이 든다. 전에 체대를 나온 트레이너 출신 동기가 나 100마리가 동시에 덤벼도 자기 혼자 상대할 수 있다며 여자수사관 무용론을 펼쳐서 격렬하게 싸운 적이 있었다. 주임시절 과장님께 검거 업무 보조라도 시켜달라고 요청해 봤지만 거절당하고 서무를 맡아 과 살림살이나 꾸리게 됐다. 신체의 한계가 아쉬울 따름이다. 어쩔 수 없이 회계 공부나 열심히 해서 경제범죄 전문가나 되어야 할 것 같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리는 일을 하고 싶다. 지긋지긋한 영수증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