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조의 상실
치료를 시작하고 여러 가지 약들을 복용한 지 9개월이 됐다. 치료 초중기까지는 내 고집 센 뇌가 약의 화학작용을 무시하거나 뚫어버리는 줄 알았다. 개중 독한 수면제만 술과 함께 마셔야 간신히 날 재울 수 있을 뿐이었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고해상도 영상 기억을 지 맘대로 재생한다든지 별 쓸데도 없는 특정 주제를 붙들고 끝없이 과몰입을 한다든지 세상 만물을 과도하게 감각하고 인지하는 기능은 조금도 무뎌지는 느낌이 들지가 않았다. 그런 뇌를 달고 산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좀 느낌이 달라졌다. 원래는 깨어있는 시간 내내 뇌가 사고를 멈추는 순간이 없었다. 좀처럼 쉬는 일이 없이 항상 팽팽 돌아가며 뭔가를 떠올리고 생각하고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하루 통근 왕복 3시간의 장거리 운전시간도 나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늘 순식간에 지나갔다.
밤에 고통스러운 기억이 재생될 때면 독한 술이나 자극적인 영상을 틀어놓고 애써 집중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곤 했다. 그 과정이 자주 괴롭고 때로는 지긋지긋했다. 폭주를 멈추고 싶고 편안하고 싶었다. 정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알코올을 퍼부어 마비시켜 잠들었다. 다른 뇌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높은 에너지 소모와 자기파괴적인 루틴이 내 숙명인줄 알았다.
하지만 요즘 문득 내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자각이 불쑥불쑥 들게 됐다. 보통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무심하고 가벼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늘 뭔가에 골똘한 채 한눈을 팔다가 뭘 쏟거나 어디 부딪히는 사고가 나지도 않고, 어떤 자극이 생겨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 그게 정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는게 치료의 목적이라고 했다. 과각성 상태를 무디게 하는 것. 처음에 원장님은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했다. 9개월이 지났다. 내게 시간이 갈수록 편안해질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야 마침내 호전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처럼 고통스럽지 않다. 사고가 저 아래 심해나 저 먼 우주로 빨려 들어가는 일도 없다. 심장이 크게 뛰지도 않고 어쩔 줄을 모르게 초조한 일도 없다. 전처럼 세상의 소리들이 너무 커다랗고 시끄럽지 않고 머리속이 뭔가로 가득차서 터질 것 같지 않다. 뭘 지우느라 흑연이 묻고 모서리가 뭉툭해진 지우개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게 되었다.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이 사라진 채로, 고요하게 텅 빈 종이를 보며 문득 이게 맞나 싶었다.
동시에 색조가 사라져버렸다. 내가 보는 세상이 비록 언제나 고명도 고채도의 형광빛이라거나 알록달록 눈부신 빛깔은 아니었을지라도, 특정 사건에 따른 감정과 감각이 각 장면의 명도와 채도와 대비를 만들었다. 그건 하나하나 고해상도로 펼쳐지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았다.
늘 이미지와 서사가 풍부하게 저장됐다. 내 모든 감각이 항상 최대치로 활성화된 채였다. 그게 꼭 늘 밝고 긍정적인 장르는 아니라 할지라도, 가끔은 입력이 너무 세서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문득 재생되면 피식 웃음이 나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런 귀중한 것들도 많았다. 코끝에 아련한 라일락 향이 맴돌고 빗방울이 피부에 스미는 촉감도 재연이 됐다. 그 다채롭고 시끄럽고 빈틈없이 꽉 찬 세계가 내겐 익숙했다.
지금은 아예 삶에서 감각이 빠져버린 느낌이다. 속도도 줄어들었다. 모든게 느리고 차분하고 무디고 일정하다. 입력되는 모든 일들의 자극과 증폭이 사라져버렸다. 내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무성의 흑백영화, 혹은 의도를 갖고 굳이 꺼내서 읽어야 하는 텍스트로 변해버렸다. 득과 실을 따져본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까? 불안도 슬픔도 고통도 사라졌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원래 이 정도로 단순하게 느끼며 산다고 하니까. 지금이 정신건강에 이로운 방향이 맞을 것이다. 그토록 추구해 온 평범과 평안에 이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계속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답지 않은 느낌. 삼류 드라마인지 광고인지에 나왔던 멘트가 떠오른다. 나다운 게 뭐지? 무한히 뭔가를 떠올리고 일상적으로 고개를 내미는 고통을 억누르며 알콜에 찌들어 쓰러져 자야 맞나?
이미지건 기억이건 상상이건 개념이건 뭔가를 끝도 없이 파고들며 주로 괴롭고 때로는 즐거움을 느끼며 일반적인 세계와 동떨어져 지내왔던 지난 삼십몇 년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니면 지금 이 흑백의, 회색조의 평온함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각과 감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슬프거나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은데, 기쁘지도 설레지도 즐겁지도 않다.
내가 장기간 복용 중인 약물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정서의 바닥선을 유지하고, 자율신경의 과각성을 억제하고, 보상회로를 차단하고, 사고를 둔화하고, 편안하게 잘 수 있게 돕는다. 약이 수십 년간 과도하게 노동하고 폭주하던 신경계의 작용을 서서히 새롭게 세팅해버린 것이 경이롭다. 이렇게 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마침내 고요하고 평탄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혼자 있는 밤이, 문득 깨어난 새벽이 시끄럽거나 서럽거나 아프지 않다. 덧없는 성냥불도 이제 켜지 않는다. 울지도 않는다.
그런데 고유색을 다 지워버리는 것이 과연 맞는 방향인 것인지, 아직 재정렬을 거부하는 내 감각신경의 말단이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불안과 고통이 없지만 삶의 색조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지금 이 조용한 흑백 무채색의 세상은 만족스러운 게 맞는지. 아직 명확한 답은 할 수가 없다. 지금은 만족을 느끼는 기능도 잠시 무뎌졌기 때문에. 고장이 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