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

by Ubermensch






대학생 때부터 내 머리스타일은 늘 한결같았다. 긴 생머리 혹은 긴 머리 끝에만 굵은 웨이브 정도. 흰 피부에 가느다란 뼈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인문학 전공, 무채색 혹은 파스텔톤의 취향 = 청순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항상 내가 청순한 스타일라고 믿었다. 여자들은 동의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내 이미지가 그쪽이 아니라고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늘 긴 생 머리를 한 번씩 잘라 다듬는 정도만 유지하고 시간이 나면 고데기로 웨이브를 좀 넣는 정도였다. 겨우내 꾸역꾸역 허리 넘어 엉덩이까지 닿을 기세로 자라난 머리카락을 보니 문득 청승맞은 느낌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미용실을 예약했다. 히피펌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지난주 인사이동으로 새로 오신 앞자리 계장님의 영향이 있을 듯도 하다. 계장님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대장군 역을 할 법한 인상에 체격도 크시다. 입직 전에는 트레이너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검도 7단 자격도 있으시고. 한쪽은 반삭, 나머지 머리카락은 길게 길러 포마드를 발라 넘기고 매일 다른 색의 현란한 넥타이를 하고 앉아계셔서 남다른 포스를 풍기신다.


내게 조사받으러 오는 구속 피의자들은 주로 헛것을 보거나 망상 장애가 있거나 칼이나 도끼, 몽키스패너 등 무기를 든 사람들이거나, 조폭 수괴 출신이거나, 공무집행방해죄 피의자여서, 여자 셋만 있는 사무실에 부를 때 조사자로서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장님께서 어떤 사건을 경찰에 보완수사를 보내려고 하는데, 함께 보내줄 자료가 있다고 하셨다. 타청에 공문을 보내 기록대출 요청을 했다. 며칠 뒤 실무관님이 수레에 박스를 잔뜩 싣고 오셨다. 기록 양이 40권이나 된 것이었다. 우리는 방대한 기록 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부장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기록을 보면 뭘 찾아야 하는지 알 거야. 저는 초급 계장이라 뭘 봐야 하는지 몰라요. 부장님이 보시고 알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그 40권 곳곳에 흩어져있는 자료를 찾아 복사하는 일은 졸개인 내 업무이기에 오전에 나는 기록을 잔뜩 꺼내놓고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앉아있었다. 부장님께서 복사는 언제 해? 하고 물어보셨다. 오후에 조사 일정도 있고 마음의 준비 좀 하고요. 복사하는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나는 앙칼지게 40권이잖아요. 했다. 저번주부터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 조사 목적으로 부른 사람이 4명이다. 앞자리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 검사실만 주말이고 평일이고 야근을 하며 팽팽 돌아가는 공장 같다.


오늘도 주말 출근을 했더니 부장님께서 내 인기척을 듣고 반갑게 찾아오셨다. 왜 나왔어. 내일 조사 준비도 하고 기록 복사도 하려고요. 그걸 하려고 일요일에 나온 거야? 40권이잖아요. 어휴. 누가 시킨 거야. 있어요.


근 일년간 긴 생머리로 지내다 뿌리부터 꼬불꼬불 잔뜩 부풀어 자유롭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보니 몹시 새롭다. 전혀 청순하지도 단정하지도 않다. 여름에 어깨가 드러나는 나풀나풀 원피스를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다. 수사관스럽지도 않다. 반항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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