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Let me introduce my darling

by Ubermensch







학창 시절 나는 주로 학생부에 끌려가 벌을 서고 있거나 손바닥을 맞고 있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곤 했다. 그래서 내 종합 성적을 알지 못하고 단과 수업만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내가 성적이 우수한 학생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전국 모의고사 성적에 기반한 지원 가능 대학으로는 서울 대여섯 개 상위권 대학만 꼽혀 있었다. 내가 다녔던 사립 고등학교는 부유한 재단의 귀족 학교라 주장하는 곳이어서, 학교에 잔디도 깔려있고 인공 폭포도 있고, 토끼들도 뛰어다니는 쾌적한 교육 환경을 자랑했다. 교복의 선택지도 다양했다. 장식은 리본, 넥타이. 상의는 피케티나 블라우스, 하의는 스커트, 팬츠. 색상도 분홍색, 아이보리색, 하늘색 등등. 비록 그 다채로운 교복의 선택지는 내가 고3 때 생겨서, 나를 포함한 우리 학년은 수십 년 전통으로 이어온 촌스러운 초록 체크 교복을 입고 졸업해야 했지만.


우리 학교에는 전교 30등 이내의 학생들에게만 주는 차별적 특권이 있었는데, 아예 건물을 따로 지어줬다. 다른 학생들은 낡은 교실에서 자습을 해야 했지만, 전교 30등 이내의 학생들은 개인 조명이 달린 따뜻한 온돌이 깔린 쾌적한 환경에서, 머리와 허리를 잘 받쳐주는 듀오백 의자에 앉아,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안마도 해주고 간식도 제공해 주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극성 엄마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더욱 좋은 특권을 받을 수 있게끔 돈을 모아 선생님께 드리자고 했지만, 우리 엄마는 동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선생님들한테 차별을 당한 건 아니다. 어느 날 석식을 먹고 토끼들을 구경하다 시간이 되어 그 특권 건물 앞으로 가자, 교지편집부 후배가 내게 물었다. 선배 왜 교실로 안 가고 그 건물로 가세요? 왜냐면 나는 여기서 자습을 하니까. 왜요? 나는 전교 30등 이내니까. 정말요??? 응. 왜 그렇게 놀라는데? 선배의 모습을 보세요. 내가 어떤데? 아니에요..


나는 학교의 빡빡한 규정을 잘 지키지 않는 편이었다. 여고라서 잘 보일 이성은 없었지만, 스스로에게 예쁜 모습이고 싶었다. 긴 머리가 좋아 두발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교복도 몸에 꽉 맞게 입었다. 화장도 하고 네일도 바르고. 늦잠을 잘 때도 많고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다 보면 지각을 하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성적과 별개로 학생부에 불려 가 혼나는 일이 잦았다. 아니 제가 머리카락을 잘라서 못생겨지고 위축된 마음에 성적이 떨어지면 선생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성적만 잘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다가 한 대 더 맞곤 했다. 그럼에도 생활기록부 종합 의견란에 호의적인 말을 기록해 주셨던 인품 좋은 선생님이 계셨던 한편, 그렇지 않고 사실대로 기재한 선생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대외적으로 상을 받아와도, 최상위권 대학의 수시는 다 떨어지고 말았다.


상관은 없었다. 내신보다 모의고사 성적이 훨씬 높았고, 단순 암기보다는 이해에 기반한 문제해결 능력 쪽이 더 발달했기 때문이다. 수능을 평소보다 잘 본 건 아니었지만 재수를 할 만큼까지는 아니어서. 원서를 접수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학교별로 수능 점수를 입력하고 합격 예상컷을 추측하는 인터넷 카페가 있었는데, 나도 내 점수를 올려놓고 예상 합격선을 둘러보고 있던 차에 대화가 걸려왔다. 내 성적은 당연히 우선선발이 될 만한 점수였고, 나에게 대화를 걸어온 애는 우선선발은커녕 일반선발도 될까 말까 해 보이는데, 우선선발에 기대를 걸고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새벽 시간대여서 마침 심심하던 차에, 나는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했다. 음악얘기, 영화얘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그 애의 점수가 하찮아보였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지원한 대학 학과에서 만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럼 학교에서 보자. 제일 예쁘고 몸매 좋은 애가 나일 거야. 안녕. 하고 대화를 종료했다. 그 애는 겸손한 태도로 내 아무 말 대잔치에 응해주며 인사했다.


나는 예상대로 우선선발이 됐고, 그 애는 일반전형으로 합격했다. 우리는 과 동기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고 그 애가 자기 이름을 말했다. 나는 그 애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 애는 우리 과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것 같았다. 심지어 키도 크고 몸도 좋았다. 이건 콩깍지가 씐 나만의 평가가 아니라 인문대 전체 남녀노소를 불문한 평가였다. 그제야 내가 그 새벽 대화창에서 내뱉은 아무 말이 떠올랐다. 그대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폭발해 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리거나.


정말 내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빨갛고 뜨거워진 채로 내 소개를 하는데, 그 애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타자를 쳐댄 내 섬섬옥수도 다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2009년 3월 18일. 그 애는 내게 고백했다. 사랑한다고 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듣고 싶다. 왠지 간지럽고 느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 해의 첫 새내기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4학년때까지 쭉 연애를 했다.


3월 새내기 수업에서, 교수님은 우리에게 과제를 내줬다. 독창적인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다들 고민에 빠졌다. 동기 언니는 과감하게 동영상을 찍어 발표했는데, 쌩얼부터 시작해 화려한 메이크업 기술을 선보이며 엄청난 변신 과정을 보여주기도 했고. 나머지는 다들 평범해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나는 창의력 대장이기 때문에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 자기를 소개하는 거였다. "Myself"가 아닌 "My darling"을. 정작 나는 연애를 하며 상대방을 자기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 오글거리기 때문이다. 나는 담백한 걸 좋아한다.


어쨌든 커다란 박스를 구해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숨고, 우리가 자기소개할 차례가 되자 사전 협조를 구한 동기 오빠들이 내가 든 박스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애는 칠판에 My darling을 적었다. 나는 박스에서 짜잔- 하고 나왔다. 천연덕스럽게 우리는, 우리 자기를 소개합니다. 하며 서로를 소개했다. 강의실은 난리가 났다. 함성과 야유가 쏟아지고 우리 둘을 포함한 동기들과 교수님,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우리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강의가 끝나고, 복도에서 다른 강의를 마치고 오며 가는 사람들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 정도였다. 우리는 A+ 학점을 받았다.


풍수지리적으로 양기가 강하다는 학교여서 그런지 전교생의 70퍼센트가 남학생이었고, 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인기 있는 여자애여서, 그 애는 나를 빼앗길까 봐 4학년때까지 군대를 안 가고 미뤘다. 그 애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내게 커플링을 해줬다. 난 별것도 아닌 일로 꼬라지를 부리며 커플링을 집어던져서 두 번이나 다시 맞췄다. 내가 반지를 강물에 집어던졌을 때는 곧바로 후회가 되길래, 엉엉 울면서 다시 찾아달라고 했다. 바보같이 착했던 그 애는 그걸 찾겠다고 강물에 들어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내가 유교걸인 데다 우리는 너무 어리고신체의 완전성을 지키고 싶다는 고집을 부려서, 4년을 만나는 동안 성인의 육체적 관계도 거부했는데, 그 애는 그것도 존중해 주었다. 마치 감기에 걸렸다는 듯한 태연한 말투로 나 권태기에 걸렸나 봐. 했을 때 그 애는 눈물을 흘리며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별 잘못도 안 했으면서 반성문도 몇 장씩 빼곡히 써줬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내가 그렇게 귀한 사랑을 받았었는지, 그렇게 귀한 사람에게 나는 왜 그따위로 패악을 부렸었는지 나 자신이지만 스스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 애는 나를 존경한다고 했다. 첫사랑의 열병에 눈이 멀었던 그 애는 스물두 살 때 나에게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다. 그때 우린 너무 어려서 안된다고 거절했던 게 돌이켜보면 천추의 한이다.


그 애가 이전에 수십 번 그래주었듯, 매몰차게 돌아서는 내 손목을 붙잡고 안아주리라 생각해서, 습관처럼 우리 이제 그만해. 했던 게, 영영 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스물세 살의 어느 여름밤. 나는 불 꺼진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엉엉 울었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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