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호의에 신중할 것
내가 아는 어떤 망한 음악가가 있다. 그 음악가가 작사한 곡을 내게 들려주었다. 엄마를 잃고 길을 떠돌던 작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데려다 편히 쉬게 해 준다는 줄거리의 곡이었다. 외워서 부를 수도 있을 만큼 수십 번도 더 들어보았다. 나는 엄마 잃은 아기 고양이를 데려다 돌봐준다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 망한 음악가에게 확인해 본바 고양이를 안락사시키는 의미라고 했다. 나는 그 망한 음악가에게 물었다. 왜 아기 고양이를 죽였나요? 아기 고양이에게 병이 있었던 건가요? 단지 엄마를 잃었다는 이유인가요? 길에 혼자 떠도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인가요? 엄마가 없이도 행복한 어른 고양이가 될 수도 있진 않은가요? 하고. 망한 음악가는 답을 거부했다.
중학생 때, 친구와 밤길을 걷다 어떤 맹인 아주머니가 큰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팡이를 탁탁 휘두르며 길을 건너려는데,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친구와 나는 저 아주머니 도와주자, 하고 얼른 뛰어가서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했다가 쌍욕을 먹었다. 미친년들아 꺼져. 라고. 생각해 보면 그 아주머니의 눈이 안 보이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 그날 밤 하루만의 특별 이벤트가 아니었을 거고, 아주머니 나름의 절차와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지도 모를 타인의 일회성 도움은 필요치 않았을 거다.
대학생 때 자폐-지체장애인들의 여가생활을 돕는 봉사를 한 적이 있다.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체육활동을 하거나 뭐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그곳엔 상주 복지사들이 있는데, 어느 복지사분이 내게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주변이 눈이 보이는 사람 기준에는 어지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들 나름의 체계가 있는 거라고. 그걸 눈이 보이는 사람 기준에서는 좋은 의도로 정리해 주려는 행동이, 오히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질서를 다 무너트리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내 기준으로 그 사람들의 질서를 망쳐버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어느 날은 그곳에서 마라톤 대회가 있었다. 마라톤이라고 해봤자 자기주장과 고집이 강력한 자폐, 지체장애인들에게 장거리를 단시간에 직선으로 달려가리란 기대를 할 수는 없으므로, 그리 장거리도 단시간도 아니었다. 내가 담당한 친구는 나보다 몸집이 훨씬 큰 내 또래의 여자였는데, 예상대로 조금 걷다가 나비를 따라가기도 하고, 가려운 곳은 뭐 그리 많은지 몸을 벅벅 긁느라 시간을 소모하기도 하고, 갑자기 바닥에 드러누워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시험과 경쟁을 좋아하고, 뭔가 시도하면 무조건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 안달 난 나로서는, 이 친구를 어깨에 둘러메고서라도 결승선을 향해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친구의 시선을 따라가 나비도 보고, 바닥에 같이 주저앉아 달리기 코스 옆에 흐르는 강물도 보고. 친구가 가려운 곳을 벅벅 긁을 때면 참 시원하겠다는 생각도 해보고. 우리는 꼴찌로 결승선에 들어갔다. 결국 이러구러 결승선까지 도달했으므로, 내 인생에 익숙지 않은 꼴찌라도 분하진 않았다.
연민이란 타인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느끼고, 그 고통을 덜어주거나 없애고자 하는 마음을 뜻한다. 동정과는 달리, 심정을 넘어 실제로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 태도까지 수반하기에, 얼핏 보면 순수 선(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전면적으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내 경험에 빗대어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네 마음을,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하는 태도는 자칫 오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태도는, 손을 내밀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어쩌면 내가 상대의 우위에 있다는 시혜적 태도를 전제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남을 돕고자 할 때, 그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내 도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진정 상대를 위하는 것이 맞는지 여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