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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밤과 달의 이야기

by Ubermensch







첫사랑의 정의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나랑 사귀자. 그래. 라는 제안과 수락이 있고, 이 독점적 관계를 대내외적으로 처음 명명한 대상을 첫사랑이라 부른다면, 내 첫사랑은 유치원생이든지 초등학생이든지 하여튼 아주 삐약이 시절로 회귀해야 하므로, 그 정의는 논외로 치기로 한다.

내 연애는 주로 이런 전개를 거친다. 내가 첫눈에 오. 하고 어떤 크러쉬를 느꼈으나 절대 내색하지 않고 꽁꽁 숨기며 새침하게 굴던 대상이, 결국 어느 순간 나에게 홀려 고백을 하게 된다. 그 고백을 들은 나는 예상 밖이라는 듯,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너 정도면 나쁘지 않으니 기회를 주어본다는 듯, 그래? 네 마음이 정 그렇다면 한 번 만나보든지. 하는 식으로 성사되곤 했다. 내 기준의 첫사랑은 저런 종류의 단단한 여자로서의 자존심과 부끄러움과 새침함의 외피를 깨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직접 쟁취해 낸, 열여섯 살 때 만난 남자애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여학교에서 남녀공학으로 전학을 가게 됐다. 내 주특기 친구 사귀기 방식대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에게도 말 걸지 않기 모드로 하염없이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상냥했다. 친하게 지내자며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주거나 쪽지도 주고. 체육복이 없던 내게 체육 수업이 있는 날마다 다른 반에서 체육복을 빌려다 주는 친구도 생겼다. 남자애들 몇몇은 내게 가슴 좀 크라며 급식에 나온 딸기 우유를 몇 개씩 모아 줬다.


학기가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났을 무렵, 교실 뒤 게시판에 반 친구 전체의 작품을 게시해야 했는데, 교단 앞에 서서 숫자를 세다 보니 한 명이 비었다. 그때 엎드려있는 애가 눈에 띄었다.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저기 엎드려 있는 애는 누구야? 모르는 앤 데. 하니까. 친구가 쟨 우리 반 훈남이야.라고 했다. 음 훈남을 내가 3개월이나 못 알아봤구나.


그때부터 그 훈남을 주시했다. 그 애는 항상 이어폰을 양쪽 귀에 낀 채 엎드려 있었다. 훈훈한 얼굴을 보기 위해 그 애의 자리로 가서 어깨를 콕콕 찔렀더니, 그럭저럭 훈훈한 것 같은 얼굴을 들고 나를 쳐다봤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다. 내 이름을 알려주면서. 걔는 내 말을 무시하고 다시 엎드렸다.


그 애는 혼자서 반 친구들 모두를 왕따 시키는 애라고 했다.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을 안 하고, 엎드려있기만 했다. 그나마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마침 그게 내 짝꿍이었다. 짝꿍을 닦달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게임을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임이라곤 테트리스와 맞고밖에 없는데, 맞고는 청소년들이 잘 안 하고 불법일 수도 있으니까, 짝꿍을 이용해 여름방학 때 우리 다 같이 테트리스를 하자고 꼬드겼다. 짝꿍은 내 지시를 잘 따라줬다.


나는 테트리스의 여왕이어서, 7:1 개인전을 해도 항상 이겼다. 나랑 팀을 하면 무조건 이겨서 그 애는 내 팀에 합류했다. 사이트에는 채팅창이 있어서, 비록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볼 순 없지만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 여름방학 내내 테트리스를 하며 나름대로 친분을 쌓은 후, 나는 관심을 끌기 위해 그 애의 책상 주변을 서성이며 말도 걸고, 먹을 것도 줘 보고, 걔 얼굴에 크림도 찍어 발라 보고, 앞에서 교복 치마를 올리는 시늉도 해봤다. 물론 안에 체육복 바지는 입고. 소녀감성으로 시도 써서 건네주고. 왠지 아파 보이는 날엔 비타민도 줘 보고. 내 노력이 가상해서였는지, 점점 그 애는 나를 보고 말하기 시작했고 어떨 땐 웃기도 했다.


그 애의 생일날, 짝꿍을 조종해 마침내 그 애를 학교 운동장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예쁘게 단장하고 케이크를 들고 서서, 떨림을 꾹 참고 말했다. 생일축하해, 그리고 나 너 좋아해. 그래서? 나랑 사귀자. 그래. 그렇게 내 첫사랑이 성사됐다. 심장에서 귀에서 작은 폭죽들이 팡팡 터지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그 애 엄마가 걱정이 많다고 했다. 여우 같은 애랑 만나는 것 같은데 아들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단다. 걔는 공부도 못하고 엎드려만 있고 혼자 반 애들 전부를 따돌리고 있었고, 내가 굉장히 어렵게 일으켜 세운 건데. 우등생인 내가 걱정을 들어도 모자랄 판에 여우라고? 좀 만나려고만 하면 그 애는 말했다. 엄마가 다 알아. 엄마가 안된대. 엄마가. 엄마가. 결국 내 첫사랑은, 그래 다 아는 너네 엄마랑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끝났다. 우리는 뽀뽀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로부터 17년 후, 아무 약속도 없이 소파에 누워있던 어느 쓸쓸한 생일날, 그 애에게서 느닷없이 케이크 기프티콘이 왔다. 조각이 아니라 한 판이. 어렸을 때 너무 찐따여서 미안했단다. 너무 늦긴 했지만 용기를 내봤다며, 사과의 의미로 밥을 사겠다고 했다. 키도 많이 컸다고 했다. 그렇게 17년 만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키가 정말 많이 자라서 184cm나 됐다. 내가 만난 남자 중에 네 키가 제일 작았던 거 알아? 하니까 그 애는 발끈하며 그땐 아직 덜 컸잖아. 했다.


혼자 모두를 따돌리던 어린 시절과 달리, 사회화가 된 성인의 모습이어서 보기 좋았다. 그제야 알게 된 거지만, 어릴 땐 우울증이 심해서 입원을 해야 할 수준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가 과보호했던 거라고. 이제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재회 이후 우리는 몇 번 더 만났고, 그 애는 나에게 다시 반했다며, 예전 일을 만회할 만큼 잘해줄 테니까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장고 끝에 승낙했다.


열여섯 살 때는 이목구비가 아기자기한 그 얼굴이 정말 잘생겨 보였다. 그리고 상대가 좋아 어쩔 줄 모르던 감정이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허망하게 끝나자, 이후 내 이상형과 연애관은 정 반대로 달라졌다. 선이 굵고 뚜렷하게 생긴 사람만 만났고, 내가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상대만 만나 받는 연애 위주로 했다.



그 애와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열여섯 살 그 뜨거운 불씨는 다시 타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너한테 마음이 안 커져. 너도 열여섯 살 때 나한테 잘못했으니까 우리 서로 비긴 걸로 하자. 잘 지내. 하고 이별을 고했다.애는 많이 아쉬워하고 슬퍼했다.




언젠가 그 애는 내게,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늘 책상에 엎드려있던 깜깜한 밤 같던 그 애의 모습과, 내가 달이 되어 그 밤을 밝혀주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해였을까 달이었을까. 결국 그 애의 세상에서 떠났으므로, 아무것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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