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름방학 보내기
처음으로 여름이 행복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건 큰 일이었다.
나는 겨울을 싫어하는 여름애호가다. 나에겐 겨울의 우울이, 여름의 기쁨이 디폴트값이었다. 겨울엔 나에게 우울과 불안이 찾아와도 '겨울이라서 그래'라는 변명을 댈 수 있었다. 빛나고, 따뜻하고, 생기로 가득 찬 여름! 여름이 찾아오면 늘 그랬듯이 행복해질 거야. 하지만 올해는 6월이 되어도, 7월이 되어도 왜인지 내가 기대했던 여름의 기쁨이 찾아오지 않았다. 사실은 어딘가 이상함을 감지하긴 했지만, 아직은 햇빛 쨍쨍하게 덥지 않으니까, 비가 오니까, 장마니까 등등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찾으며 나를 속였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변명을 댈 수 없었다.
왠지 이때쯤이면 힘들겠지 싶어 생일 즈음 미리 잡아둔 베트남 여행에 자괴감과 불안이 따라왔다. 그날은 밤비행기를 타고 베트남으로 떠나는 날이었는데 하필 외근이 잡힌 날이었다. 원래의 사무실이 아닌,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아침부터 캐리어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출근했다. 긴장도가 높은 일을 해야 했기에, 아침부터 미리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조사를 하다가 출근했다. 하루 종일 두뇌 풀가동을 하며 일을 하고 직통열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체크인을 하려는 순간 여권 대신 먼 옛날 사뒀던 자전거 국토종주 수첩을 가져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다행히도 아직 공항으로 이동하기 전이었기에 집에 가서 무사히 여권을 챙겨 여름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웃긴 에피소드고 누군가에게는 큰일이 아니겠지만, 평소에 이런 실수를 한 적 없었던 나에게는 내가 이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외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요즘 일이 많아서 챙길 기력이 없었나, 어제 퇴근을 좀 늦게 해서 그랬나, 아니 그래도 왜 여권을 다시 한번 체크하지 않았지? 평소엔 여권을 챙긴 걸 알면서도 몇십 번씩 다시 확인하던 나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나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멘붕으로 시작했기 때문일까, 여행 내내 불안과 자괴감이 계속 마음 속에 따라다녔고 낮아진 체력으로 인해 배터리가 빨리 닳아버리는 나를 발견했다. 1월에 같은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기에 나의 변화를 더 빨리 체감할 수 있었다. 조금만 뭘 해도 지쳐버리고, 평소처럼 좋아하던 맥주를 많이 마시지도 못했다. 축 젖은, 바람이 통할 여유의 틈도 없이 꽁꽁 싸매 절대로 마를 수 없는 한 뭉치의 빨래가 마음속에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것 같았다. 은희경 작가님의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생각났다.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
아마 그건 휴식의 메시지인 것 같았다. 여름에는 쉬면서 여름 방학을 보내야지!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무리하고 있었다.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이고 데이터 교육부터 퇴근하고 뉴스레터, 팟캐스트, 굿즈 제작, 강연 들으러 가기 등 이런저런 일을 벌이고 있었다. 일을 잔뜩 벌려놓곤 친구도 만나고 싶고, 운동도 하고 싶고, 취미 생활도 하고 싶고, 데이트도 하고 싶어 일상 속 쉬는 시간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휴가에 함께 간 짝꿍도 쉼이 필요한 것 같다는 말을 해줬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객관적인 진단과 따뜻한 지지는 위로가 됐다.
여름휴가를 다녀와서는 마음먹고 쉬기로 결정했다. 불편한 마음, 이러다 영영 다시 시작할 마음이 안 들면 어떡하지라는 불안도 있었지만 그냥 쉬었다. 원래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해보기 시작하고, 조금이라도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 여름 방학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여름 제철 과일을 먹기
국수 삶아 먹기
여름밤 산책을 하기, 쨍쨍한 햇빛에 달궈진 몸을 풍덩 담가 수영을 하기, 자전거를 타기
주말 아침 평화로운 거리를 걸으며 조조영화를 보러 가기
한 달에 한두 번 찜질방에 가서 몸의 긴장을 풀기
책 읽기 싫으면 책 읽지 말기
그래도 여름이니까 김연수 작가님은 읽기, 분명 나에게 평온을 가져다줄 테니
퇴근하고 일 생각하지 않기
정 힘들면 '퇴사하면 되지 뭐...'라고 생각해 버리기
복싱 시작하기
식물들 돌보기
딱히 외부적인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을 다르게 가지니, 일상이 다르게 보이긴 한다. 이게 바로 김하나 작가님이 말씀하신 '힘 빼기의 기술'인가 싶다. 신기한 일이다. '여차하면 퇴사하면 되지, 퇴사해도 별 일 안 일어날걸? 사이드 잡 그냥 작게 해 보자. 안 되면 말고!'라는 가벼운 마음가짐을 가지니 일상의 행복도가 확실히 높아졌다.
중요한 건 이 생각을 '진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잘하고 싶고 욕심나면서 주입식, 세뇌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 진정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 늘 진지하고 예민해서 감정 곡선이 요동치는 나인데, 이 평온하고 가벼운 상태가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다. 흐물거리며 바다를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살아가고 싶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