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GV빌런 고태경>
취준생 시절, 가장 희망적이면서도 절망적이게 느껴졌던 단어가 '기회'였다. "괜찮아. 기다리면 너에게 맞는 기회가 올 거야!"라는 말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간신히 붙어 가게 된 면접에서 떨어진 후에는 그토록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생각에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도대체 기회란 무엇이고 어떻게 찾아오는 건가 늘 궁금했다. 특히 원하는 꿈이 명확하게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기회가 더 더디게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길고 길었던 지난 6년 동안의 대학생활을 돌이켜보았을 때 한 가지 느꼈던 점은 늘, 너무 지쳐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에 도달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는 점이었다. 공연계로 가고 싶었을 때, 다 포기하고 아무 인턴이나 해야지 했던 순간 오케스트라 공연 기획 인턴 합격소식이 찾아왔었다. 해외로 가고 싶었을 때도, 1년 내내 해외 인턴 모집에 서류조차 붙지 않더니 이번 서류만 넣고 그만해야지 결심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넣은 인턴에 최종 합격했다. 취준생 시절 정말 하고 싶었던 콘텐츠, 개발협력 분야부터 무역업, 금융업까지 온갖 기업의 서류와 면접을 겪고 난 뒤 정말 돈만 벌 수 있다면 어디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자 정말 나와 잘 맞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업에 최종 합격을 하게 되었다. 아마 그 오랜 실패의 시간 동안 나의 노력과 경험치가 조금씩 쌓여 레벨이 올라가다가 지칠 때쯤 결과를 낼 수 있는 레벨에 도달함 + 할 거 다 해보고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져서 긴장 없고 오히려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마음으로 대함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패턴을 세 번 겪으니 앞으로 어떤 일을 목표로 할 때, 지칠 때까지 노력해보면 뭐라도 결과가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틸 힘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말도 모든 일을 겪고 뒤돌아 생각해보니 가능한 것이고, 아직 그 인내의 터널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터널의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이 소설은 그 깜깜한 실패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고 느꼈다. 어떻게 보면 뻔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gv빌런이라는 트렌디한 요소와 영화계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 흥미롭게 풀어냈다고 생각했다. 내가 영화에도 관심도 많고,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터널 안에 있던 취준생이었어서 와 닿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 내가 좋았던 인물은 중심인물이었던 혜나와 고태경이 아닌 승호였다. 승호는 영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한교영에 들어온다. 그런 승호를 동기들은 무시하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이것 저것 해보고 배우며 영화에 대해 배워간다. 이런저런 일을 겪은 후, 행복하려고 영화한 건데 행복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호는 다른 일을 하게 되지만, 도망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영화 말고 또 다른 사랑하는 일을 찾아 또 다른 행복에 몰두하는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도 승호의 대사였다.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뭘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겠어?" 주인공은 늘 꿈을 이루지만, 현실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 하게 된다고 해도 좌절하지 말고, 또 다른 행복한 일과 사랑하는 대상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건강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에 본 이슬아 작가님의 칼럼이 생각났다. 이 소설에서 말하려는 바와 비슷한 맥락으로 반복과 꾸준함이 큰 재능이라는 이야기의 글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써왔고 출판계에서 일을 하게 된 사람임에도 글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 칼럼과 이 소설이 큰 위로로 다가왔다. 늘 정해진 루트를 타고 오다 대학을 갓 벗어난 사회초년생인 나에겐, 이제 정해진 루트가 없는 미래가 망망대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이 큰 바다에 내가 어떤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정말, 정말로 꾸준함도 재능이라면 난 재능이 있는 것이라고 믿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다 보면 결과를 낼 레벨에 도달한 미래에 또 무언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006160300115&code=990100
-노력해서 성취의 경험을 해본 사람의 자신감 같은 게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승호의 모든 전제에는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런 면에서 승호는 나와 달랐다.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결과를 예측하려는 나와 달리 승호는 어차피 예측한다고 해도 변할 건 없으니 그냥 두는 성격이다.
-아무리 세상에 동기 부여되는 말들이 많이 있다지만 '나도 하겠는데?'만큼 효과적인 동력은 없다.
-십 년 넘게 무언가를 기다리고 손에 잡힐 듯하다 멀어지고 반복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돼.
-도대체 자기가 하는 일에 긍지가 없어.
-재능이니 뭐니 하는 건 이십 대에나 하는 거 아냐? 그냥 하는 거지. 이 나이 되니까, 재능 있다던 사람들 그만두고 재능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성공하는 것도 다 지켜봤어. 꾸준히 계속하는 의지야말로 진짜 재능이지."
-내가 고태경에게 놀란 점은 패배 의식이나 자격지심이 거의 없다시피 한 거였다.
-힙하다는 거 대체 뭘까. 사람들이 따라다닐 걸 제공하는 거지 뭐.
-카르페 디엠이니 욜로니. 그렇게 살고 싶어도 감독 지망생뿐만 아니라 입시생들이, 취준생들이, 모든 청춘들이 유예된 삶을 살고 있다.
-상업성이라는 건 대체 뭐고 그 판단의 주체는 누굴까.
-그토록 오래 바라던 일인데 한 번은 펼쳐 보이고 싶어.... 고태경은 본인의 취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의 취향을 깎아내려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냉소를 두르고 남을 조롱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고태경은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자기가 좋아한 것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았다. 우리가 추구하던 꿈과 기대하던 삶이 전부 무너진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뭘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겠어?
-나는 승호가 기특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무너지고서 스스로 일어나려고, 승호는 필사적으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영화와 멀어지건, 키보드에 빠지건, 사랑하는 것을 찾아 애쓰는 게 느껴졌다. 그 스스로 회복할 줄 아는 건강함이 아름다워 보였다.
-누가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도록 만들다니. 나는 너무 고립되어 있었구나 싶었다. ... 새삼 고태경이 정말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독려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외부에서 누군가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면서도 그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지지자가 되어주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면 뭔가를 도모하고 거기에 몰두할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이제는 실패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와 연출 노트를 열심히 쓰면서.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가 아직 안 된 것 같아 "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 나는 앞으로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