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 파괴자

카이사르의 등장부터 죽음까지..

by 미친생각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알고리즘은 근본적으로 변화합니다. 시민들은 점차 병역에서 멀어졌고, 배급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에 익숙해졌습니다. 납세와 국가에 대한 직접적 책임 또한 느슨해졌지요. 반면 귀족들은 배급과 검투 경기를 선거 수단으로 활용하며 권력을 유지했고, 개인의 재산 증식에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귀족이 국가 제도를 만들고, 이를 근간으로 시민이라는 에너지가 국가로 모이던 구조가 무너진 것입니다. 인간과 국가를 잇던 연결 고리는 점점 느슨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카이사르는 상당한 명문가 출신입니다.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 귀족 중에서도 전통 있는 네임드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문은 당대의 주류 귀족 정치에서 밀려나 있던 상태였고,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주류 가문에 비해 재정적 여유도, 최근의 정치적 성과도 부족한 상황에서 출발한 셈입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정석적인 출세 경로를 따라 직진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분명히 역량이 뛰어났고, 동시에 야망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게르만과 갈리아 전쟁에서 그는 차별화된 전공을 쌓아 올립니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로마가 두려워하던 외부 변수를 직접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정보를 로마 시민들의 뉴런에 확산시키는 데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전략은 전공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막대한 빚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정보를 도파민으로 확산시키는 데 공격적으로 투자합니다. 이 과정에서 진 빚의 규모는 당시 귀족 사회에서도 이례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대규모 검투 경기와 축제, 배급을 통해 시민들의 도파민이 되었고, 일반 귀족을 능가하는 연회와 화려한 건축물로 귀족들의 도파민 또한 자극합니다. 전쟁 전리품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며 자신의 공을 과시하기도 했지요. 이로 인해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적도 늘어났지만, 그의 정보는 이미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카이사르는 로마 사회에서 하나의 도파민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합니다. 결국 그는 집정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는 로마 역사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였습니다. 본래 로마의 집정관은 개인이 아닌 제도 자체를 대변하는 자리였고, 누구든 그 자리에 오르면 시스템에 종속되는 구조였습니다. 따라서 집정관이 된 뒤에야 막대한 권력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요. 그러나 카이사르는 달랐습니다. 그는 집정관이 되어 권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막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집정관 자리에 진입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로써 이미 위태하던 로마의 시스템은 본격적으로 균열이 가속되기 시작합니다.


집정관이 된 이후 카이사르는 공공 토지를 잃은 시민들에게 재분배하는 토지법을 추진합니다. 이는 과거 자영농을 근간으로 강력했던 로마를 복원하려는 시도였고,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우호 세력에 편승한 일방적인 투표 방식을 활용하며, 형식적인 절차를 지킨 채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시민들은 이미 대거 도시로 유입된 상황이었고, 노예 농장과의 규모와 기술 차이가 극심한 환경에서 자영농은 승산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토지를 분배받은 시민들조차 장기적으로 이를 유지하지 못했고, 결국 토지를 다시 팔거나 도시로 돌아오게 됩니다. 의도는 달성되지 못한 채, 적대 세력만 늘어난 셈이지요. 이는 법이 점차 상식과 조정의 도구가 아니라, 인기와 동원의 결과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강력한 계기가 됩니다. 이 시점부터 국가를 위한 알고리즘은 소외되고, 오로지 개인을 위한 알고리즘만이 폭주하는 구조가 되어버립니다. 결국 로마의 균열은 파열로 악화됩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 종료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당시 로마의 정서상 갈리아는 멀고 위험한 지역이었고, 집정관 경력을 가진 인물이 가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문제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고, 카이사르 또한 정치적 회피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성립한 인사였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활용합니다. 전쟁의 전리품과 토지를 나누며 병사들의 충성을 확보하는 방식을 통해, 군대라는 공적 집단을 자신의 개인 세력으로 전환합니다. 사람에게 도파민을 각인시키는 데 있어 카이사르가 특출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후 로마 정치권은 다시 한 번 카이사르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를 로마로 소환합니다. 이는 사실상 정치적 제거를 전제로 한 소환에 가까웠습니다. 카이사르 또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요. 결국 그는 루비콘 강을 넘었고, 독재관이 됩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회의 도중 정치인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카이사르의 도파민은 결국 그 자신에게도, 국가에게도 지속 가능한 형태는 아니었음이 이로써 증명됩니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의 알고리즘은 더 이상 국가 단위로 에너지를 응축하지 못하게 됩니다. 개인과 집단은 각자의 이익을 프롬프트로 입력하기 시작했고, 에너지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지 못한 채 분산됩니다. 이는 질서의 붕괴라기보다, 국가라는 조정 장치가 사라진 상태가 된 것이지요. 로마라는 국가의 도파민과 에너지는 이 시점에서 우상향으로 수렴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