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라는 정보처리장치가 국가 알고리즘을 바꾼 순간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국방력은 급격히 쇠퇴합니다. 그리고 결국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에 완전히 패배하게 됩니다. 당시의 전쟁은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과격한 방식이었습니다. 승전국은 패전국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구조였지요. 영토와 자원은 물론이고, 인간까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카르타고의 모든 것은 로마의 것이 되었고, 다수의 카르타고 시민들은 로마 귀족들의 노예로 편입됩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하고 수준 높은 국가였습니다. 카르타고의 마고(Mago)가 남긴 농업 서적은 당대에 이미 명성을 떨친 기술서였고, 로마 원로원의 명령으로 라틴어로 번역될 정도였습니다. 카르타고 시민들 또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로마로 유입된 카르타고 노예들은 단순 노동력이 아니라 고급 숙련 노동력이었던 셈입니다.
노예라는 신분으로 인해, 이들은 거의 무상에 가까운 비용으로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로마 사회에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합니다. 당시 로마의 귀족들은 라티푼디움이라 불리는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대 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인 칼로리를 생산할 실물 구조는 이미 갖추고 있던 셈입니다. 기존의 귀족들은 이 대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로마 시민 자영농에게 품삯을 지급하며 고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자영농이 카르타고 노예들보다 농업 기술이나 행정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농업과 행정에 모두 능숙한 카르타고 출신의 고급 노예들이 대량으로 유입된 것이죠. 그리고 이들은 거의 무상에 가까운 비용으로 노동을 수행합니다.
귀족의 요구, 즉 프롬프트를 보다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정보처리장치가 유입된 것입니다. 이제 귀족들이 로마 자영농을 고용할 이유는 사라집니다. 농장의 마진은 자연스럽게 상승했고, 카르타고 노예들의 기술로 인해 생산량 또한 크게 증가합니다. 과거에는 귀족들조차 생산량 부족으로 인해 식량을 농민에게서 구매해야 했지만, 그럴 필요마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오히려 잉여 생산물이 누적되었습니다. 라티푼디움의 생산력 상승으로 잉여 생산물이 급증하면서 지중해 해상 무역도 함께 활성화됩니다.
귀족들의 순이익은 더욱 증가했고, 이 자본은 다시 공격적인 농지 확대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불법 점유와 같은 부당한 사례들도 빈번히 발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로마의 자영농들은 땅을 잃고, 일자리도 잃게 됩니다. 농지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도시로 향합니다. 도시에서는 생계유지가 가능할 것이라는 새로운 기대치를 설정한 것이지요. 도파민 설정값이 바뀐 겁니다.
이 사건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오늘날의 기계화와 AI 도입에 비견할 만한 변화였습니다. 저가의 숙련 노동력이 대량으로 유입될 경우, 기존의 고비용 노동력은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 구조와 거주 패턴, 나아가 국가 전체의 운영 방식까지 변화시킵니다. 국가라는 정보처리 시스템의
알고리즘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결국 생명이든 문명이든, 모든 정보처리장치는 작동을 위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적은 에너지로 더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정보처리장치들은 고유한 가치로 경쟁하기보다는 상대적 비교우위로 경쟁합니다. 이 현실을 인지하는 것, 그 자체가 개별 정보처리장치가 지닌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