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본질과 의미

문명 알고리즘은 화폐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by 미친생각

근대 시대에 들어 은행이 문명의 중심에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돈이 문명의 집단 알고리즘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은행은 돈을 관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화폐의 본질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행이 질서의 중심에 올라섰다면, 그들이 관리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초기의 주된 화폐는 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금속 기반의 거래 방식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3천년 무렵의 수메르부터 은은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시기에는 금속 화폐가 일상적 거래의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수메르의 주된 지급 수단은 곡물이었습니다. 기름이나 양모가 지급되기도 했고, 지급할 물자가 부족한 경우에는 은으로 보충하는 사례도 존재했습니다. 국가의 곡물 부족에 대한 에너지 청구권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장거리 무역이나 고액 거래, 벌금 지급에도 은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은은 부족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고가치 거래를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도, 거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도 기능했습니다.


고대시대, 거래의 기본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별 정보처리장치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곡물은 가장 직접적인 에너지였고, 생필품과 자원 또한 생존과 직결되었습니다. 물론 장신구나 장식품처럼 번식과 사회적 입지를 높이기 위한 소비도 존재했습니다. 결국 거래는 자기유지와 정보확산을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래에 곡물과 현물이 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장거리 거래나 고액 거래에서는 곡물처럼 무거운 에너지를 직접 운반하는 것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보다 합리적인 거래수단인 은이 사용되었습니다. 거래 방식 또한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수렴했던 셈입니다.


이 시기 은은 동전 단위가 아니라 무게 단위로 거래되었습니다. 즉, 화폐라기 보다는 금속 기반의 거래였던 것입니다. 이후 기원전 7세기경 리디아에서 국가가 일정한 무게와 순도의 금속에 보증을 찍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무게를 매번 확인할 필요가 줄어들었고, 거래 속도는 빨라졌으며, 신뢰 비용은 감소했습니다. 이 방식은 점차 확산되었고, 로마 시대에 이르러 화폐는 문명의 핵심 교환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원하는 것을 화폐로 교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문명 전반에 고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현물 기반의 세금과 거래 형태는 잔존했지만, 국가의 법과 규칙은 점차 화폐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종교나 도덕이 사회에 고착되는 방식과 유사하게 봅니다. 종교와 도덕이 집단 유지를 위한 알고리즘이었다면, 화폐 역시 집단 운영을 위한 알고리즘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법률이 금전 중심으로 정렬되면서, 국가의 통치 구조 안에는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정량화되기 시작합니다. 처벌은 벌금으로, 의무는 납세로, 동원은 급여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통치의 계산 단위를 보다 명확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생산성이 증가하고 정보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금전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와 재화의 범위도 확장되었습니다. 일부 시기에는 사치품 접근이 제한되기도 했지만, 장기적 흐름 속에서는 서민의 소비 영역이 점차 확대된 것입니다. 이것 또한 동서양 모두 화폐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화폐를 통해 교환의 호환성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정보확산을 통해 인류의 기대의 범위가 넓어졌고, 갈망의 스펙트럼이 커졌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교환의 범용성이 높은 화폐는 더욱 선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통치의 핵심은 인간이라는 개별정보처리장치의 에너지를 어떻게 국가의 연산에 동원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은 식량으로 충전되고, 기대를 통해 움직입니다. 로마의 배급이 그랬고, 잔 다르크의 승리가 그런 식이었습니다. 반대로 인간은 공포에 주저하게 됩니다. 국가는 보상과 처벌이라는 공포 장치를 통해 개인이 국가에 손실이 되는 행위를 억제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알고리즘 안에 금전이 깊숙이 편입되면서, 기대와 공포는 더욱 정량화되고 구조화되기 시작합니다. 급여, 세금, 벌금, 채무, 보상은 모두 숫자로 표현되며, 통치의 계산은 이전보다 명확해졌습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국가는 연산을 출력함에 있어 에너지가 필요했던 것이고, 국가 입장에서 통제가능한 효율적인 에너지는 인간이 유일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에너지는 식량으로 충전되는 구조였던 것이죠. 즉, 근대까지의 문명에서 가장 핵심은 인구수와 식량이었던 것이며, 이 두가지가 풍족하고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국가가 강력한 힘을 지닐 가능성이 아주 높은 구조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기대와 공포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근대시대 이전까지는 인간의 뇌에 기대와 공포를 배선하는 도구로 종교와 도덕이 주로 사용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근대 초기에 이르러 은행이 통치 알고리즘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면서 질서는 한 단계 변합니다. 전쟁의 지속 여부가 재정 능력에 좌우되고, 동맹의 안정성이 신용에 의해 평가되기 시작합니다. 종교는 여전히 인간을 동원했지만, 국가의 생존을 결정하는 계산 단위는 점차 재정 능력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은행이 문명 질서에 올라선 시기를 기점으로, 통치 알고리즘의 중심축은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이동합니다. 과거 초국가적 권위를 상징하던 종교 권위 옆에, 초국가적 금융 네트워크가 영향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합니다. 질서를 정당화하는 언어는 여전히 도덕과 신앙이었지만, 질서를 유지하는 실제 계산은 점점 더 금전으로 수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근현대에 이르어 화폐는 또 다시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 근대까지의 역사를 설명한 만큼, 화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정리해두겠습니다. 이제 이 달라진 통치 구조 위에서 근대의 유럽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