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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돌이 Jun 26. 2015

단절되는 우리

지금 이 땅의 학생들은 왜 깊이 생각하기를 꺼리는가


요즘 고등학생들은 대체로 집중력이 낮은 편이다. 비단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저희들끼리 대화를 할 때에도 하나의 주제로 5분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몇 개의 짧은 구절들로 본인의 감상을 짧게 던지고, 듣는 이들의 대답 역시  한두 마디로 동의나 거부를 표할 뿐이다. 세 문단 이상으로 된 글, 아니 세 문장 정도의 짧은 예시문도 독해에 애를 먹곤 한다. 5분 이상 깊이 있고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게 귀찮고 힘에 겨운 일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나도 얼마간 동의하는 원인은 스마트폰이다. 짧은 문자와 카톡, 각종 SNS와 이미지 중심의 소통 도구들은 아이들에게 단절되는 삶의 행동방식을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나도, 아내도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비슷했을 거라고 가끔 이야기하곤 할 정도니까. 하지만 스마트폰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주범이라고 몰고 가기엔 어딘가 부족한 게 많다.


효율의 기준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한국인들은 빨리빨리병에 걸렸다'고들 했었다. 민족이라는 범주 설정이 마뜩잖지만 그건 차치하더라도, 여유 있게 지내는 사람은 곧 게으른 사람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는데 어떤 면에선 예전보다 한층 강화된 면이 있다. 지금 이 땅에선  속도뿐만 아니라 효율도 중요해졌다. 문제는 그 효율의 기준에 있다.

IMF 사태가 지금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 이전에도 학력 격차 문제나 학생들의 입시부담 문제는 언제나 큰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품성'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는 있었다. 아무리 학교 성적이 우수하거나 잘 사는 집의 학생이라도 소위 '싸가지'가 없으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었고, 엄마가 사소한 일까지 뒤치닥꺼리 해주는 아이들도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중에 교실에서 기죽어 지내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약삭빠르고 이기적이지만 성적이 좋은 아이들, 매사 부정적이고 까칠하지만 돈이 많은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어려운 집안의 학생들은 점점 성적이 떨어진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이런 현상은 부쩍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우리 교실의 아이들에게 효율이란 곧 성공이며, 성공은 곧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학기초에 학생들에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써보라고 한다. 처음엔 열 개 정도를 쓰라고 한 뒤,  그중 다섯 개를 선택하게 하고, 최종적으로 단 하나만 남겨보게 한다. 내가 중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해봤을 땐 '친구', '가족', '사랑' 따위가 많았다. 지금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최후의 순간에 '돈'을 선택한다.


돈 많이 벌어야 해요

입시 상담을 할 때,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뭐니?'이지만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어디 가면 취직 잘되나요?'이다. 지금 이 땅의 학생들에겐 여유 부릴 틈이 없다. 돈 잘 버는 직장에 들어가려면 좋은 대학을 가야 하고, 그러려면 성적이 좋아야 한다. 아마도 이들은 자라면서 돈이 없으면 이 나라에서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지 너무도 생생히 지켜봐왔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여유와 끈기를 기대하는 건 구운 밤에 싹이 나길 바라는 마음과 같다.

12년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다시 4년을 공부해서 취업을 준비하지만 대다수는 비정규직으로 시작하거나 아예 그런 자리조차 얻지 못한다. 예전보단 나아졌다고 하지만 고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곱지 않고 대우도 좋지 않다. 해마다 뒤바뀌는 교육정책 속에서 허우적대던 아이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어버리는 무지막지한 계급의 벽 앞에서 끝내 무릎 꿇는다. 그 담을 뛰어넘기가 예전 세대들에 비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들은 곧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전전하게 되고, 아무 일이나 월급을 제 때 주는 일을 찾게 된다. 내가 처음 가르쳤던 아이들 중 일부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외로운 아이들

이런 때에, 지금 당장 내가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채워가는 이런 때에, 따뜻한 마음으로 타인과 더불어 지내기란 어찌 보면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점점 더 고립되어간다. 문학 수업시간에 제시된 사진 중에 하나를 골라 짧은 시를 지어 보는 활동을 했다. 많은 아이들은 노숙자의 사진을 골랐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건 성적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외로움'을 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은 사람을 쉬이 지치게 한다. 그저 잊고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지금 아이들의 한없이 얕은 사고력은 결국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고통을 본인들 스스로 받아들이게 할 '아프니까 청춘' 따위의 거짓 위로나, 진정성을 가장하여 이대로 살면 경쟁에 도태되어 굶어 죽을 수 있다는 협박은 그들을 더욱 지치게 한다.


고3의 高삶을 위하여

이제 곧 기말고사가 시작된다. 이 시험이 끝나면 이제 본격적인 대입 수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반 아이들의 삶이 苦삶이나 孤삶이 되기보다 高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타인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의 중요함을 알고,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이 땅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교사라는 자리에 있지만, 그래도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은 내 이야기의 한끝을 놓치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훗날, 내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옛날에는 남들에게 관심 없고, 생각하기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때가 있었다고, 계급의 철벽 앞에 무기력한 채 모두가 물질적 욕망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얘기하며 아이들에게 웃음을 사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 무지막지한 시대를 변화시켜야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잊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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