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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ckie May 12. 2020

영혼을 잃은 삶 혹은 삶을 담은 예술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주로 단편 위주로 저작활동을  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유일한 장편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집 이후 늘 읽어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히지 않더군요. 아마도 예술과 미, 그리고 감각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오스카 와일드가 장문의 주장을 하는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요샛말로 아이돌입니다. 천상의 외모를 지닌 그를 화가 바질 홀워드는 초상화로 남깁니다. 그리고 삶에 대해 자극적이면서도 순간의 쾌락과 도덕적 잣대에 연연해 하지 않는 바질의 친구 해리에게 도리언 그레이는 매료당합니다. 하지만 바질이 도리언의 초상화를 완성한 순간, 바질은 도리언이 지닌 아름다움 매료당해 그를 숭배하기 시작하고 도리언은 자신이 지닌 젊음과 아름다움의 힘을 깨닫고 이를 평생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제 시작됩니다. 도리언 그레이가 비도덕적이고 쾌락주의적인 행위를 할때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세월과 행위가 주는 결과는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초상화가 가져갑니다. 즉 도리언은 변하지 않은 아름다움과 젊음을 유지하지만 그의 초상화는 세월과 그의 행동의 결과를 그대로 그의 얼굴에 반영하며 늙어가고 변해갑니다. 




그것은 도리언에게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영혼을 담지 않은 비도덕적인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외모에 그에 속아가는 사람들. 


영혼을 담고 있기에 현실적인 예술작품. 하지만 추함과 늙음이라는 삶의 어두움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작품. 




어느 것이 좀더 삶의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요?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이 되고 싶던 모습은 도리언 그레이였지만 자신의 본 모습은 바질 홀워드였고 남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은 헨리 워튼이라고 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삶의 마지막까지 대중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유미주의자로서의 오스카 와일드의 삶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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