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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ckie May 12. 2020

소설 ‘레베카’ 속에 레베카는 없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

                                                                                                                                                                                                                                                                                                                                                                                                                                                                                                                         

작년 말에 가장 보고 싶었던 뮤지컬은 ‘레베카’였습니다. 어쩌다 보니 계속 기회를 놓치고, 지금은 도저히 볼 용기가 안 나서 아쉬움이라도 좀 덜어 볼 겸 책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이 책, 요거요거 정말 물건입니다. 기대 이상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 ‘나’는 세상천지에 혈연 하나 없는 고아와 다름없는 처지입니다. 돈 많은 노부인을 돌보며 월급받는 하녀같은 생활을 하다가 여행 중에  부인과 사별한 돈 많은 귀족 남자 맥심을 만나 급작스럽게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어릴 때 엽서에서 보았던 멋지고 유명한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 되어 신데렐라가 되는가 싶지만, 이 저택 뭔가 수상합니다. 이 저택은 사고로 죽었다는 전부인 레베카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죠.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도, 차를 마시는 시간도, 화병을 놓는 위치도 이 저택의 전부인 레베카가 정해놓은 규칙에 맞추어 돌아갑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더 소름돋는 것은 레베카가 사용하던 방이 마지막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겁니다. 죽기 직전에 입었던 잠옷과 사용하던 머리빗까지 말이죠. 







게다가 레베카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레베카’를 비교합니다. 레베카는 키 크고 날씬한 몸매의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풍성한 검은 머리와 흰 피부를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었죠. 게다가 열정적이며 사교적이고 재능마저 풍부하여 보는 사람마다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 숭배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나’는 비천한 출신의 볼품없는 몸매와 평범한 외모를 가졌습니다. 낮은 자존감에 나이까지 어리고 사회경험 없으니 그저  ‘아이’에 불과합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여전히 레베카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내 남편 맥심 마저 말이죠. 그러니 맨덜리 저택에서의 내 삶은 점점 불안해지고 초조해집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은 마지막까지 소설 '레베카' 속에 레베카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 레베카는 그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이미지로 떠올려질 뿐입니다. 살아 있는 레베카는 소설 속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나'는 이미 사라져 버린 '레베카'를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러니가 소설 속 나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책 속에 긴장감을 더욱 고조 시킵니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마법이 레베카를 영원히 살게 한건지도 모르죠. 





이 소설은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성장소설입니다. 자존감 낮은 사회 초년생이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아가고 결국은 사랑을 쟁취(?)한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나'와 맥스와의 관계만 놓고 보자면 로맨스 소설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 없는 소녀가 돈 많은 귀족 남자를 만나 수많은 오해와 역경을 만나지만 결국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거든요. 맥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고 그것이 밝혀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범죄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인칭 시점으로 불안한 심리가 전개된다는 면에서는 스릴러 소설입니다. 특히 댄버스 부인이 나를 경계하며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불안감에 대한 표현은 디테일하며 그 뉘양스가 세심합니다.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이 스릴러 소설로서의 심리묘사가 아주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불안한 나의 마음을 1인칭 시점이라는 제한된 시각과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어찌나 교묘하게 재단해 놓았는지 읽는 내내 예측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더군요. 게다가 마지막까지, 진짜 마지막 페이지까지 - 592페이지가 마지막인데 마지막 단락에 등장합니다 - 뜻밖의 상황들이 연달아 펼쳐지고 마음을 놓지 못하게 만드니 사실 이 소설은 결국은 너무나 잘 쓰여진 스릴러 소설이구나 싶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재능에 경탄해 마지 않던 저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팬이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책이 '자메이카 여인숙', '희생양', '나의 사촌 레이첼', '단편집' 이렇게 4편인데 당장 읽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합니다. 뮤지컬이야 어찌되었든 그저 이렇게 훌륭한 작가를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뮤지컬은 다음 기회로 또다시 미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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