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가 인물을 압도할 때 - 회복이라는 이름의 폐허
[본문 안내]
이 글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시즌3>의 결말 및 핵심 장면을 포함한 전면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시청하지 않으신 분이라면, 감상 후 읽는 것을 권합니다. 또한, 이 글은 작품의 주제적 구조와 창작자의 위치 변화에 대한 비판적·철학적 관점의 비평을 담고 있으며, 단순 리뷰가 아닌 해석적 독해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회복의 끝, 혹은 반복의 시작
기훈은 떨어졌다. 아이는 남았고, 섬은 무너졌다. 그러나 어딘가에선 또 다른 '딱지'가 건네지고 있다. 이는 인간성 회복의 종말인가, 아니면 감정으로 포장된 또 하나의 윤리적 회피인가?
'오징어게임 시즌3'는 시리즈의 종지부를 찍는 작품이었다. 적어도 제작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장면은, 구조의 붕괴가 아닌 구조의 반복이었고, 인간성의 회복이 아닌 감정의 소진이었다. 본 비평문은 오징어게임 트릴로지의 종결이 과연 철학적 귀결이라 부를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특히 시즌3가 지닌 창작 구조, 캐릭터 설계, 그리고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의 명백한 실패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창작자, 질문자에서 기획자로 — 황동혁의 위치 변화
황동혁은 '도가니', '남한산성', 그리고 '오징어게임 시즌1'을 통해 꾸준히 체제 비판과 인간 내면의 도덕적 질문을 던져온 창작자였다. 그의 작품들은 사건을 통한 문제 제시에 강했고, 인간이 구조 안에서 어떻게 좌절되고 윤리를 유보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데 탁월했다. 하지만 시즌3에서 그는 철학적 질문자라기보다는, 사전에 설계된 메시지의 전달자이자 구조의 완결자처럼 보인다.
이는 단지 창작의 태도 변화가 아니다. 시즌1 이후 그는 넷플릭스와의 계약 및 세계적 흥행을 통해 더 이상 주변부의 비판자가 아닌 중심부의 생산자가 되었다. 시즌2~3는 그 위치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며, 감독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돈 때문에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 지점은 창작 동기의 변화뿐 아니라, 창작자의 철학이 그 구조 안에서 어떻게 무력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기획된 결말, 기능화된 캐릭터
시즌3의 가장 큰 문제는 서사보다도 캐릭터에 있다. 시즌1의 기훈은 체제 내의 패배자이자 인간적 약자였으며, 점진적인 각성과 윤리적 충돌을 통해 스스로의 윤리를 획득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시즌3에서의 기훈은 행동은 있으나 동기가 없고, 감정은 있으나 맥락이 없는 인물로 퇴행한다. 그 행위는 더 이상 내면적 결정이 아닌, 주제적 설계를 위한 기표로 작동한다.
이러한 인물의 붕괴는 단지 기훈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캐릭터가 시즌3에 이르러서는 뚜렷한 내면이 사라진다. 이들은 플롯의 구조를 완성시키기 위한 기능적 부품으로 동원되며, 인간으로서의 개연성과 독립성을 상실한다. 보통 이러한 경우는 창작자가 먼저 결말을 설정해놓고,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인물을 끼워 맞추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즉, 창작의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감정의 무기화, 철학의 실종
시즌3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한 임산부와 아기는 감정적으로 강력한 장치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야기의 방향성은 한정된다. 아이를 죽일 수 없는 서사, 아이를 지켜야만 하는 도덕적 프레임은 그 자체로 구조적 긴장을 제거한다. 기훈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며, 아기의 생존은 설계된 결말이다. 그 사이에서 어떤 진정한 윤리적 갈등도 발생하지 않는다.
아이는 상징이다. 희망의 기호이며, 재생의 표상이다. 그러나 이 아이가 의미를 갖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설정들이 강제로 삽입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아이를 낳기 위해 임산부가 필요하고, 임산부를 보호하기 위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며, 그 희생이 감동적이기 위해 극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모성과 연민이 등장한다. 감정은 여기에 없다. 캐릭터의 내면도 없다. 다만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를 완성하기 위한 감정적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감정의 역전, 연민이 모성애를 이길 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감정적 충격은 강하지만, 정서적 설득력은 극도로 약하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를 위해, 그 여자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인다. 단지 아기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이 장면은 전통적으로 서사 내에서 가장 강력한 윤리인 ‘모성애’를 일순간의 ‘연민’으로 압도하는 기이한 감정의 서열화를 보여준다.
물론 서사는 감정의 질서를 전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전복은 인물의 내면적 갈등과 망설임, 선택의 고통을 통해 설득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장면엔 갈등도, 망설임도 없다. 감정이 먼저 배치되고, 인물은 그것을 따르는 기호로 기능한다. 감정은 서사적 축적의 결과가 아니라, 정서적 쇼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구조에 압도된 감정, 그리고 폐쇄된 결말
이명기라는 인물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감정이 거의 제거된 인물로,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잠시 망설이지만, 절망의 순간에는 아이를 버릴 준비를 한다. 마지막에 아이를 넘기는 장면 역시 인간적 고뇌가 아닌 기능적 장면에 가깝다.
철학적 질문의 여지는 배제되고, 감정적 승화만이 강조된다. 이는 결국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를 감정의 무기화로 처리한 셈이며, 회복이 아닌 소비다. 도덕적 선택은 사라지고, 감정적 반응만이 남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서사의 중심이 아니며,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어떻게 하면 감동을 유발할 것인가'에 대한 계산이다.
철학에서 기획으로 - 열린 질문이 닫힌 명령으로 변할 때
황동혁이 잘했던 것은 언제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었다. 그는 답을 말하지 않고, 관객이 불편함 속에서 질문을 이어가게 만드는 창작자였다. 시즌1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열린 질문의 정수였다. 그러나 시즌3는 다르다. 종결되어야 했고, 감동을 유도해야 했으며, 프랜차이즈를 확장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 순간부터 열린 철학은 폐쇄된 구조로 변모했다.
결말은 더 이상 질문이 아닌 명령이다. 이 장면은 감동해야 하고, 이 선택은 숭고해야 하며, 이 죽음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강요된 감동 속에서 캐릭터는 살아있지 않으며,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시즌3는 인간성 회복을 외치면서 가장 비인간적인 구조로 귀결된다.
오징어게임 시즌3는 회복이 아니라 포기였다. 회복을 말하면서 회복의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제거했고, 인간성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을 도구화했다. 창작자의 사유는 성공 이후의 인정욕구와 금전적 보상이라는 틀 안에서 소모되었고, 트릴로지라는 구조적 요구는 그로 하여금 결말을 '정리'하도록 강제했다.
철학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질문을 멈췄고, 정서를 강화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황동혁은 더 이상 비판자가 아니라 기획자가 되었고, 기훈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메시지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오징어게임 시즌3의 진정한 비극이며, 한국 콘텐츠 산업이 겪는 '성공 이후의 자기 붕괴'를 보여주는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