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제에 대한 성찰
우리는 가끔,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아버지가, 혹은 그의 형이, 혹은 그의 민족이 어떤 일을 저질렀다는 이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불편함은 그 사람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어딘가로부터 '기억'처럼, 아니, '본능'처럼 번져온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누구를 보고 있는가? 그 사람을, 아니면 그를 통해 투사된 과거의 망령을?
연좌제란, 범죄자의 가족이나 친인척에게 그 죄의 책임을 물어 처벌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관습 또는 제도이다. 형식적으로는 현대 민주국가에서 폐지되었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언어와 제도, 감정과 시선 속에 살아 숨쉰다. ‘아버지가 빨갱이였다’, ‘형이 조폭이었다’, ‘그 민족은 원래 잔인하다’는 식의 말들은 그 죄가 혈통과 기억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는 연좌의 그림자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연좌제는 다음과 같은 두 원칙에 도전장을 내민다.
개인 책임 원칙: 윤리적 판단과 형벌은 오직 행위자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규범.
자기동일성의 불가역성: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과 행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지, 타인의 행위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실존적 전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좌는 왜 이토록 강력하게, 오랫동안, 심지어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을까?
연좌제의 뿌리는 심리학적이고 신화적이다. 고대 사회에서 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신과의 계약을 어긴 '오염'이었다.『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했을 때, 그의 자손들도 피의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죄는 정화되지 않는 한, 대물림되며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신화적 인식은 현대사회에서도 정체성의 본질을 둘러싼 불안을 자극한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흔히 ‘가족’, ‘민족’, ‘역사’를 말한다. 그럴 때, 타인의 죄를 ‘내’가 짊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그저 문화적 오류가 아니라 정체성 구성의 방식 그 자체가 된다. 즉, 연좌제는 단순한 법률적 시스템이 아니라 “나는 나의 조상이다”라는 정체성의 집단화에서 기인하는 자연스러운 산물인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을 말한 바 있다. 아이히만은 괴물이라기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순응적인 관료였고, 그의 죄는 체계적 복종이었다. 하지만 그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은 아이히만 개인이 아니라, 독일 민족 전체, 나아가 그들의 후손에게도 복수를 요구했다. 이처럼 집단적 기억은 범죄를 개인화하지 않는다. 범죄는 어떤 '체제', '문화', '민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며, 그 문화 전체를 제거하거나 억압함으로써 정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정서가 작동한다. 이는 ‘연좌제는 사라졌지만, 연좌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정당화된다’는 오늘날의 딜레마다.
이 딜레마를 가장 극단적으로 묘사한 최근의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진격의 거인』이다. 에르디아인들은 과거 거인의 힘으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고, 마레인들은 이를 기억하며 에르디아인 전체를 죄인으로 규정한다. 에르디아의 후손들은 거인의 힘을 이용해 다시 마레를 공격하고, 마레는 그 보복으로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만나게 된다.
“과거를 되갚는 정의는, 현재의 누군가를 희생시켜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작품 속 어떤 등장인물은 말한다. “우리는 태어난 것만으로 죄를 지었다.” 그의 이 말은 연좌제의 철학적 공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선언이다. 그는 후대가 더 이상 죄인이 되지 않도록, 과거를 모두 파괴함으로써 미래를 새로 쓰려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과연 '연좌에서의 해방'인가, 아니면 '극단적 연좌의 완성'인가?
현대사회에서 연좌제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지만, '역사적 사과'는 요구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들은 일본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독일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깊은 반성과 교육을 이어간다. 이때 후손은 법적 책임은 없지만, 도덕적 책임은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두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
형벌의 연좌: 후손에게 실질적인 처벌이나 배제를 가하는 것 — 정당화될 수 없음.
도덕적 연좌: 후손이 선대의 죄를 인식하고, 그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 — 긍정적 의미 가능.
그러나 이조차도 강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은 타율적 명령이 아니라 자발적 책임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연좌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면죄’가 아니라 기억에 대한 주체적 해석이다.
연좌제는 죄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 인간의 본능, 정체성을 공동체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집단주의, 그리고 기억을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면, 그리고 진정한 책임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타인의 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과거로부터 영향받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지도, 완전히 묶여 있지도 않다. 연좌제를 극복하기 위한 길은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것이다.
“나는 너의 죄에 책임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죄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막을 책임이 있다.”
그것은 피로부터 벗어난 자유이면서, 기억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이기도 하다. 이 에세이가 당신에게 울림이 있다면, 아마도 당신은 『진격의 거인』을 단지 정치적인 복수극이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의 윤리학'으로 읽은 독자일 것이다. 그런 당신에게 연좌제는 과거의 제도이기 이전에, 오늘도 누군가의 시선과 말투, 의심 속에 살아 숨 쉬는 현실의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