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잔상 기록

[스포주의] 영화 <노이즈> 감상문

이 시대의 공포영화가 만드는 '불협화음'에 대하여

by 김형건
무섭게 들리긴 하는데, 무서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국산 공포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다. 영화의 제목은 <노이즈>. 관람을 시작하기도 전, 나는 이미 영화 외적인 어떤 감각에 휘말려 있었다. 꽤 많은 중학생 관객이 단체 관람을 온 듯했고, 영화 시작 전 극장 안에는 왁자지껄한 웃음과 속삭임이 흘러넘쳤다. 그러던 찰나, 누군가 외쳤다.


“레쓰기릿!”


그 한마디가 어쩐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미리 요약한 것처럼 느껴졌다는 걸 나는 상영이 끝난 뒤에야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 영화는 장르적 정체성을 살짝 비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포영화가 시작됐는데 웃음이 터지고, 긴장해야 할 장면에서 관객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딘가 엇나가 있다. 관객의 반응도, 영화의 구성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노이즈’로 다가온다.


<노이즈>는 이름 그대로 소리를 주된 테마로 삼는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정체불명의 음향, 특정한 주파수를 들으면 보이는 환영, 그리고 소리로 인한 감각 붕괴. 그러나 이 모든 장치는 어디까지나 설정에 머문다. 사운드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어떤 감정이나 철학을 품고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내내 말한다. “이 소리엔 뭔가 있어.” 그러나 끝내 그 ‘뭔가’를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버린다. 공포가 심리적 전이의 과정이라면, 이 영화는 그 전이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관객을 다음 장면으로 떠민다. 한 발짝 들어가기 직전, 멈춰 선다. 그리고 방향을 돌린다.


그 방향 전환은 장르 전체의 불협화음으로 이어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종종 잘려나가고, 인물의 동기나 행동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공포라는 감정은 한 장면 안에서도 끊기고 새어 나온다. 우리는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대신, 상황의 설정을 파악하기에 급급해진다. 갑자기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 한 번 나오고 사라지는 장치, 설명 없는 미장센. 마치 퍼즐 조각은 많은데, 그 전체 그림을 감추려 애쓰는 듯한 인상이다. 그때부터 관객은 무섭기보다는 해석하려는 태도로 영화를 바라보게 된다. 감정 몰입 대신 서사 검열. 공포를 체험하지 못할 때 남는 것은 결국 의심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어릴 적 밥상에 잠깐 올라왔다 금세 사라지던 고기반찬을 떠올렸다. 한 입 크기로 겨우 나타났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는 무서움. 감정선이 이어지지 않으니, 영화는 계속해서 새로운 효과로 자극을 주려 한다. 음향, 편집, 카메라워크, 배우의 표정. 모든 것이 순간순간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는다.


공포는 반복이 아닌 지속이다. 스치듯 지나간 공포는 사람을 무섭게 만들지 못한다. 잠시 놀랄 수는 있지만, 그건 놀이공원 귀신의 집과 다르지 않다. <노이즈>의 공포는 오히려 그 ‘스쳐감’에 의해 무력해진다. 물론 시도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사운드를 통해 감각과 정신을 연결하고, 현대인의 피로감과 트라우마를 소리의 언어로 번역해보려는 시도를 한다. 소음 공해, 정보 과잉, 감정의 왜곡, 관계의 혼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청각적 은유로 끌어오려 한다. 그러나 그 은유가 끝내 사고의 깊이로 이어지지 못한 채, ‘컨셉’으로만 소비된다는 점이 아쉽다. 상징은 있었으나, 그것을 뚫고 나가는 질문이 없었다.


소리는 왜 우리를 괴롭게 하는가? 감각의 과잉은 어떻게 불안을 유발하는가? 그 질문이 없으니, 공포도 없다. 정지된 상징만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진짜로 무섭게 만든 것은 영화 외부의 반응들이었다. 중간중간 터져나오는 웃음, 휴대폰을 확인하는 관객, 조용히 나가버리는 사람들. 그 반응들이 이 영화가 관객과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보여준다. 관객이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고, 대신 그 장르의 실패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 그건 공포영화에 대한 신뢰의 붕괴이자, 장르 자체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묻게 된다. 공포영화는 무서워야 하는가? 이 단순한 질문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점점 무섭지 않은 공포영화에 익숙해지고 있다. 오히려 ‘적당히 무섭고, 해석거리가 많고, 불편하지 않은’ 공포를 선호하게 되었다. SNS에 올릴 수 있을 정도의, 토론할 만한 키워드를 갖춘,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공포.


그런 점에서 <노이즈>는 지금 시대의 공포영화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문화적 스냅샷일지도 모른다. 공포는 결국, 침묵과 불안을 통해 감정을 파고든다. 그러나 <노이즈>는 소리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 소리 사이의 침묵을 잃어버렸다. 침묵이 없는 소리는 그저 자극이고, 자극만으로는 사람을 무섭게 만들 수 없다. 결국 이 영화가 끝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은 귀신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공포영화라는 장르가 내지른 곤혹의 신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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