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구르르 Dec 24. 2022

눈이 오는 날에는 맨발로 춤을 춰요

여구르르는 언제나 맨발로 춤을 추나요?

훌라를 추는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맨발로 땅을 밟는다. 바닷물에 젖어 반짝이는 모래알 위에서, 풀숲 위에서, 돌산 위에서 거침없이 신을 벗는다. 간혹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바닥이 아프진 않은지 물어보는 이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좀 으쓱한다. 훌라는 맨발로 추는 춤이고, 내겐 그럴 수 있는 체력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자유롭게 맨발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원인불명의 관절 시림 탓에 더위로 절절 끓는 여름에도 양말과 슬리퍼를 신어야 했다. 회사를 그만둔 후 천천히 체력이 차올랐으나 맨발로 땅을 밟는 것은 언제나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맨발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참을 수 없이 솟구친 것은 훌라를 시작하기도 전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창 밖에 펼쳐지는 날씨와 상관없이 24시간 쾌적한 실내공간이 불편했다. 밤낮의 경계가 흐려지고 계절의 구분이 무너진 사무실에서 몸도 병들어갔다. 쉬는 날이면 우산 없이 비구름을 따라갈 정도로 계절감을 갈구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위해 맨발로 땅을 밟아야 했다.​

가파른 나무 계단 옆 벤치에 앉아있다가 주섬주섬 신을 벗었다. 맨발 걷기를 어싱(earthing) 혹은 접지라 부르는 이들이 추천한 작은 산에서였다. 날씨와 컨디션에 따라 여전히 관절의 시림 증상이 오락가락하는 중이었으므로 여차하면 바로 발을 닦을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과 수건이 든 가방을 옆자리에 내려둔 채였다. 깊은 호흡을 들이쉬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발을 내디뎠다. 몸과 땅이 맞닿는 순간 울컥하고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발바닥이 열을 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하지 못하던 일을 몸이 다시 해내고 있었다.


​ 땅은 차갑지만 두 발이 그 밑으로 뿌리를 깊게 내린 느낌이 들었다. 땅의 기운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복근과 척추기립근이 바르게 섰다. 몸의 중심이 단단하게 서자 피가 돌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애꿎은 승모근이나 장요근에 주던 힘이 빠져 몸이 편안했다. 발바닥을 넓게 써서 올바르게 섰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척추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넓게 펴고, 몸을 편안하게 갖춘 상태에서 땅으로 누르는 에너지를 쓰는 것은 훌라의 기본자세였다.

잘 닦인 아스팔트가 아닌 산길에선 걸음마다 다채로운 감각이 펼쳐졌다. 물이 흘러갔던 자리는 그렇지 않은 곳보다 더 차가웠고 낙엽이 쌓인 길은 부드러웠으며 발 밑에서 잘잘한 돌멩이가 밟히거나 나뭇가지가 부서졌다. 핫팩이나 진통제, 공복의 셀러리 주스로도 어찌할 수 없던 통각의 밤들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양말로, 이불로 둘둘 싸매고 잠든 밤마다 쌓였던 비관이 점차 옅어졌다. 기계적으로 걷던 습관에서 벗어나 매 걸음 정성을 다해 걷는 동안  ‘아픈 몸’에 대한 혐오도 내려놓았다. 아팠던 기간 동안 마음 한 구석을 꽉 채우고 있던 부정성이 사라지자 ‘나도 할 수 있다’는 감각이 빈자리에 차올랐다.

아직도 컨디션 난조를 겪을 때면 바닥의 냉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온다. 그러나 이제는 무력감에 젖은 몸을 웅크린 채 울지 않는다. 제대로 돌보지 않아 망가져버린 몸이라도 충분한 시간 동안 달래주면 영원할 것 같은 고통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경험. 그날 내가 딛고 선 것은 희망이었다. 그래서 맨발로 땅을 밟는 일은 그저 재미있는 일 이상의 의미이다. 훌라를 추기 위해 자연과 맞닿는 순간은 매번 작은 도전이며 훌라 스텝을 밟을 때마다 경이의 마음으로 대지의 에너지를 느낀다.​


와이키키 훌라클럽이 개장한 이후에는 함께 춤추는 이들을 이 감각의 잔치로 기꺼이 초대한다. 날씨가 허락하는 날 한강공원에서, 수확이 끝난 당근 밭에서, 썰물이 빠져나간 속초의 바다에서 신발을 벗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천진하게 웃는다. 마침 내가 사사하는 히바히바라니 스승님은 땅에 더 가까이 가닿는 방식의 훌라를 가르치신다. 땅과 교감하며 발바닥 깊이 뿌리를 뻗는 이 춤은 그녀의 스승인 에훌라니 스테파니 쿠무훌라*를 통해 전해 내려왔다. 오래 전의 하와이안들이 그랬듯, 신을 벗고 춤추는 이들 모두  커다란 자연의 일부가 되어 바람처럼 불고, 별처럼 빛나고, 물처럼 흐른다.  ​


하늘이 온통 하얗다. 모카케이크 색으로 변한 잔디밭 위에 슈가파우더처럼 얇으리한 장식이 쌓이고  뺨에 닿은 송이는 차가울 새도 없이 녹아버린다. 겨울 공기가 달콤하고 소리 없이 조용한 아침의 공원에서 차례대로 옷을 벗는다. 깽깽이 다리를 짚으며 양말을 한 짝씩 벗어 겉옷 주머니에 넣어두고, 몸에  걸친 것이 붉은 하와이안 드레스뿐일 때 맨발로 눈밭을 디딘다. 발바닥에 닿는 땅의 감촉은 차갑고 발바닥은 열심히 열을 내는 게 느껴진다. 걸어온 그대로 자국이 남아서 발도장을 찍듯 꾹꾹 걷다가 빙글빙글 돌아보고 제자리에서 뛰어도 본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쿠무훌라: 훌라를 가르칠 자격을 가진 이를 칭한다. 할라우훌라(훌라 학교)를 운영하며 춤으로서의 훌라 뿐 아니라 하와이의 정신과 문화를 영구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게 계승하는 역할을 맡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와훌 존폐의 기로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