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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구르르 Jan 12. 2021

퇴사 전에 챙겨야 할 것

사표를 품은 당신이 코어 근육을 챙겨야 하는 이유

     “퇴사하기 전에 코어 근육 챙겨야 돼요.” 내 귀를 의심했다. 코어 근육이요?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퇴사 준비하면서 몸이고 정신이고 탈탈 털려서 얼마나 망신창이가 돼서 나와요. 퇴사하기 전에 무조건 코어 근육을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나오고 나서도 쌩쌩해. 얼마 전에 제가 폐차할 정도로 크게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다 코어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5년 전 필라테스 학원 선생님이 어떻게 걸어서 왔냐고 물었을 정도로 부실했다던 그분은 이제는 아침에 등산을 하고 수영도 다니는 데다 글쓰기 모임을 3개나 참여하고 있고 곧 출판을 앞두고 있으며 2개의 팟캐스트를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 이 정도면 코어 근육이 아니라 아이언 맨의 아크 원자로 수준이 아닌가.

     2018년 11월 15일에 첫 출근한 지금 회사에서 나는 입사 일주일만에 퇴사를 마음먹었다. 업계에서는 통상 3개월의 수습기간이 있어 사실상 그 기간 내라면 별 다른 준비 없이 퇴사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퇴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개인적인 목표를 2년 안에 달성하리라 타임라인을 정한 후 퇴사하기로 했다. 딱 2년이 되던 때 목표를 달성했고, 내 생에 지난 2년만큼 매일같이 퇴사 욕구를 느낀 때도 없었다. 아침에는 이 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 생각하며 출근했다가 정신없이 일하며 퇴근하기도 했고, 다음 날엔 할만하다 생각하며 출근했다가도 점심시간이면 퇴사 욕구가 솟구쳤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프리랜서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회사에서 뛰쳐나올 생각이었으니 먼저 그 길을 간 언니들은 어땠는지 들어본 것이다. 그러면서 퇴사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는데 다음과 같다;
1. 그동안 진행한 프로젝트/ 나의 성과.
2. 회사 안에서 만들 수 있는 인맥.
3. 마이너스 통장, 신용 대출, 전세 대출.
이것 말고도 나의 첫 주식인 회사주도 정리해야 하고, 미뤄뒀던 실손보험금 신청도 해야 하며, 그 외에도 챙길 것들이 산더미인데 그중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 코어 근육이었다.

     생각해보니 퇴사 전 챙길 것 중 코어 근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건강 문제로 퇴사를 통보한 동료들은 마지막 출근 날엔 거의 기어서 나갔고, 마음에 상처를 입고 퇴사 한 사람들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칩거하며 미드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동안 극심한 허리 통증을 겪었다고 했다. 코어 근육이 탄탄했다면 걸어서 퇴사하지 않았을까? 마음의 상처를 잊기 위해 미드를 보는 동안 통증 없이 누워있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아니, 마음이 나은 게 아니라 허리 통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건 아니야? 그러고 보니 내가 퇴사하고 싶은 백만 가지 이유 중에 하나는 코어 근육이 없어서 인 것 같기도 했다. 분명 낮에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봤을 땐 걷고 싶었는데 퇴근하자마자 침대가 나를 부르는 이유는? 아침마다 일어나기가 싫고 무기력한 이유는? 어깨가 뭉치고 목이 빳빳한 이유는? 아닌 게 아니라 코어 근육의 부재가 문제였다.

     마음을 먹었다고 코어 근육이 생겼으면 이 세상 사람들 배에 왕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겠지만, 의지만 있다면 근력운동만 하겠는가. 다룰 수 있는 악기가 2개나 생기고,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1일 1 일러스트를 인스타그램에 올려 디자인 외주로 투잡을 뛰고 있을 테다(작년에 내가 조금씩 발을 담갔다 뺐던 일들의 리스트가 맞다). 각각의 실패를 모두 회사 탓으로 돌리며 나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고, 그 시간을 하루에 적어도 8시간씩 저당 잡고 있는 것은 회사가 맞으니까. 그렇지만 퇴사 전에 코어 근육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아픈 곳을 꼬집었다. 그동안 힘들었던 이유의 8할이 일이었어도, 나머지 2할은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던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빤히 보여서다. 과로는 운동 부족을 부르고, 운동 부족은 체력 저하를 부르고, 체력 저하는 다시 일만 해도 힘든 삶을 부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언젠가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의지도 코어 근육에서 나온다. 퇴사 전 준비물 리스트에 코어 근육을 추가한다. 코어 근육이 생기고도 퇴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다면, 진짜 그만 둘 준비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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