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햇빛에 내 우울도 뽀송뽀송해지길
가을의 초입, 여름 햇빛처럼 따갑지 않고 따사롭다. 탈수가 된 빨래를 팡팡 털어 건조대에 널다가, 고시원 좁은 방에 살던 때가 떠올랐다. 2평 되는 방에는 건조대가 없어서 겉옷은 공용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았다. 여성전용 층인 2층이 있었고, 3층은 남성전용 고시원이었는데, 2층 관리자인 총무가 남자였다. 한날은 건조대에 내 속옷까지 누군가 개놓았다. 처음엔 빨래 널 자리가 없어서 옆 방에 사는, 김치죽을 나눠주던 보험판매원 아주머니가 내 속옷을 개어놓은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남자 총무가 그랬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는 수납칸이 있는 책상의 상단에 문을 열고 문짝에 속옷을 널어놓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런 옷가지들을 다 싸들고 2년 8개월 고시원 생활을 접고 본가로 내려갔을 때 일이 떠올랐다. 짐이랄 것도 없고, 옷가지와 책이 전부였는데 박스는 택배로 붙였다. 택배는 내가 본가에 온 다음날 도착했다. 상자를 열어 본 엄마의 첫마디는 옷 사 입을 돈도 없냐였다. 거지 같은 것 다 갖다 버려라는 말도 함께.
생각이 많은 나로서는 일상을 맨 정신(바른 정신)에 유지하는 게 힘이 든다. 이렇게 많은 우울한 에피소드가 시시때때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늘 상 취해있었는지도(비겁한 변명입니다만).
그 때 나는 걸레짝 같은 내 옷이 속상했고, 수치감이 몰려왔다. 그다음엔 분노, 그리고 어쨌거나 저쩠거나, 2년 8개월 서울 생활에 원조나 지원 따위 없었던 엄마에 대한 원망이 피어올랐다.
그 시기 엄마에 대해 원망감을 갖게 된 것은 엄마의 외도, 그리고 할아버지의 유산에 대해 내 돈인데 왜 네가 탐을 내냐는 말(사실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런 것 때문이었는지도. 그러니까, 이 일화에 따라오는 수치, 분노, 원망감은 한데 뭉쳐져 마음 이곳 저곳을 계속해서 굴러다니다가 거대하고 거대해졌고 언제나 통증을 동반했다. 이런 통증에 괴로워하느라고 20대 시간들을 흘려보내다가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딸에게 상처 주는 것이 엄마의 목적일까. 이렇게 밖에 못사는 게 화가났을까. 2년 8개월 타지에서 고생하고 온 뒤 딸의 거적때기 같은 옷가지들이 엄마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엄마'는 자신의 '딸'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생각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단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우리 딸, 고생했다는 한마디. 변변한 옷도 못 사 입고 타지생활 하느라 애썼다는 말, 그 말이 전부였다.
사실 엄마도 20대 때 백화점 안내원이나, 공장등을 전전하며 서울생활을 했다. 그러다 서른이 다 돼 아빠를 만나 나를 낳고, 마포에 정착했는데 할아버지가 도와주시기 전까지는 직원생활을 하던 이발 가게 뒷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동생을 낳고 큰 수술비가 필요해서 빚까지 지게 됐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마포 우리 집에 왔다고 한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딸과 몇 년 만에 상봉했을 때, 할머니는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엄마가 나에게 했던 그 말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받은 것을 주게 되어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 위로 받지 못한 사람은 어쩌면 엄마가 아닐까. 엄마의 마음 곳간은 텅 비어있어, 딸인 나에게 줄 것이라곤 단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내 기억 속 엄마를 제 3자가 되어 지켜보기로 했다. 어렵지만 한 번 해보기로 했다. 햇빛에 널어 둔 빨래가 마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