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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영 Dec 25. 2016

혼자하는 여행의 묘미

벨기에 브뤼헤에서 브뤼셀을 거쳐 다시 일상으로

 오늘은 크리스마스, 다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나는 오늘도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 영화 보고 일기를 쓰거나 예전 일기 펴 보고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사실 혼자인 걸 즐기는 편이라 여행도 자주 혼자 다닌다. 어떻게 혼자 여행을 하냐고 심심하지 않냐, 무섭지 않냐, 물어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면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해서, 나도 완전히 혼자 돌아다닌 여행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외롭지 않고 친구랑 같이 하는 여행이랑은 또 다른 재미인데, 오랜만에 발견한 '혼자 여행'의 기록을 공유하고 싶다. 왜 혼자서 여행하느냐에 대한 대답이 될 거 같다.






2016년 6월 10일



 벨기에에 가기로 급작스러운 결정을 내렸다. 일상의 권태와 외로움의 그림자가 어깨에 달라붙어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모든 것에 의욕을 잃었고 슬픔을 나누어 줄 사람을 찾기가 참 어려웠다. 그러다 떠올려보니 애초에 내가 외롭기 위해 여기에 왔었구나.

 수업 중간에 뛰쳐나와 내린 결론은 어디로든 떠나야겠다는 거였다. 누구보다 혼자이지만 외롭지는 않게. 아무도 없는 새벽 차도를 30분 걷고, 5분 정도 늦은 1시 25분 버스를 타고, 버스 안에서 실컷 잤다. 뒤셀도르프에서 까먹지 않고 졸지도 않고 환승하기 위해 내렸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한 5시 45분, 환승 시간은 3시간이나 남았다. 케밥집에 와서 채식 되너를 주문했다. 모든 재료를 넉넉하게 넣어 주신 덕에 묻히고 흘리며 실컷 먹고, 홍차도 한 잔 했다. 한참 앉아있다가 계산을 하고 나가려니, 아저씨가 몇 시 차를 타냐며 1시간이나 남았으니 더 있다가 가라고 하신다. "어디서 왔니? 독일어를 잘 하는구나." 그 칭찬에 왜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을까. 아직도 버스가 오려면 50분이 남았다.




 드디어 브뤼헤에 왔다. 어제 끓어오르는 답답함과 우울함 때문에 1시간이 넘게 힘주어 걸어대서 아직도 다리가 당긴다. 중간에 버스 문이 고장 나는 바람에 1시간이 넘게 연착이 되었는데 그러려니 했다 생각보다 버스에서 잠도 잘 잤다. 정말 오랜만에 낯선 곳에 오니 설렌다.

 이 곳은 벨기에 중에서도 네덜란드어를 쓰는 곳인지 중앙역에서부터 네덜란드어가 많이 보인다. 어떻게 그걸 아는가 하면, 불어와 많이 다르고 독일어와 많이 비슷하다. 그래도 1년쯤 독일어를 배웠다고 네덜란드어까지 대충 이해를 하는 게 참 뿌듯하고 신기하다. 왠지 벨기에 사람들은 항상 웃고 장난스러울 것 같았는데, 표정들이 딱딱하다. 그리고 나는 당연스럽게 영어보다 독일어가 먼저 튀어나오는데, 다들 독일어로 대답해준다. 관광지라 외국어인 독일어를 잘 쓰는 걸까?


브뤼헤에서 찍은 첫 사진


 날씨가 따뜻하고 건물들이 예쁘다. 큰 기대 없이 와서 실망도 없다. 해가 떠서 기분이 좋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오니 신경 쓸 게 하나도 없이 내 멋대로 하는 것도 좋다. 먹어도 먹어도 금방 배가 고프고, 돈을 부족하게 뽑아 온 데다가, 영어 실력이 줄은 걸 느껴서 그건 별로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 데나 철퍼덕 앉아 신발을 벗고 어쩌면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을지 모르는 글자들을 눌러 적고 있으니 참 좋다.


특별할 거 하나 없었다고 일기에 써 있는 3.8유로 감자튀김




 저녁 9시, 브뤼셀이다. 가장 싼 곳으로 급하게 예약한 숙소는 생각보다 좋다. 친절한 직원, 깨끗한 시설, 조용한 분위기. 시끌벅적한 호스텔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조용한 곳이 마음 편하다. 뜻한 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겨야지. 오늘은 프랑스와 루마니아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인데 여기서 누구를 응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체크인을 할 때부터 꼭 보러 오라고 해서 일기를 쓸 겸 맥주도 마실 겸 내려왔다. 각자 조용히 TV로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8명, 나는 TV 옆 쪽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한다. 자기 나라 경기가 아닌 건지 핸드폰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그냥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얼마 전 멘자에서 스크린으로 축구경기를 볼 때는 몇 시간 전부터 다들 자리를 맡고, 시끄럽게 응원을 하진 않았지만 서로 대화도 없이 집중해서 보기에 역시 축구 강국이구나 싶었는데.

 호스텔에 딸린 바에서 맥주를 하나 시켜서 먹고 있다. 피곤한데 알코올까지 들어가니 잠이 아주 잘 올 것 같다. Helles Bier(라거) 중에 추천해달라고 하고 아무거나 마셨는데 맛있다. 라들러처럼 달달하진 않지만 너무 톡 쏘거나 쓰지 않고 깔끔하다. 맥주를 시킬 때 또 독일어로 주문했다. 대답도 독일어로 들었다. 체크인할 때는 속으로 계속 영어 써야지, 하고 연습한 덕에 영어로 말을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말하려면 독일어가 나온다. DSH 시험 너무 싫어서 도망쳐 왔는데 역시 떠나봐야 안다고 1년 동안 늘은 건 독일어뿐인가 보다. 거창했던 계획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Waterloo 맥주와 땅콩





2016년 6월 11일


 아침 일찍 일어나 부실한 조식 뷔페를 몇 번씩 왔다 갔다 접시를 채워가며 먹었다. 밤에 비가 오더니 지금은 그쳤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차다. 머플러를 사고 싶은데 참아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조금 뽑아 와서 어쩔 수 없다. 호스텔에서 방을 혼자 쓴 건 처음이다. 편하고 생각보다 외롭지 않다. 외로움은 사람 사이에서 온다. 3개의 빈 침대들은 허전하지 않다.

 브뤼셀은 생각보다 조그맣다. 미술관까지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다. 숙소 근처에 아랍 상점들과 아랍인들이 많은데 괜히 무섭다는 생각을 하다가, 인종차별적인 생각이었다고 깨달았다.




 그랑플르 광장은 화려하지만 굉장히 작았고, 오줌싸개 동상은 기대 없이 봐서 실망도 없었다. 이제 벨기에의 자랑이라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보러 가야겠다.




 아무래도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미술관이 열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다가 근처의 다른 박물관으로 왔다. 악기박물관이다. 생각보다 ㅈ어말 좋은 곳이다. 도로롱 도로롱 잠결에 머리칼을 쓸어주는 듯한 뮤직박스, 지잉 하고 어지럽게 울리던 에코 기계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꼭 닮은 악기들(닮았지만 소리를 내는 방식이 다르다. Fiddle은 첼로와 똑같이 생겼지만 현을 긁는 게 아니라 때려서 소리 내고, Geigenwerk는 건반을 누르는 동시에 반대편에서 휠을 돌려주면 바퀴에 현이 긁히면서 소리가 난다.), 저절로 발바닥을 타닥 구르게 만드는 흥겨운 전통 악기들, 일본과 중국의 전통 악기들도 있었다.

 전통 악기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서로 별개로 발전해 오면서도 타악기, 현악기, 관악기로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도 신기했지만 현대 악기들이 연주하는 재즈 블루스 노래들, 나무에 찍힌 기록들을 그대로 재생하는 오르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집에 가서 다시 듣고 싶은 음악들이 많다. 전시된 악기들을 보면서 녹음된 소리로만 듣다 보니 도대체 어떻게 소리를 내나, 어떻게 연주를 하나 보고 싶은 악기들도 있다.

 꼭대기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방문했다. 지친 몸 이끌고 커피나 한 잔 하려 했는데, 점심시간에 딱 맞춰 온 데다 테이블 세팅까지 해 주니 식사를 안 하기가 민망해졌다. 가난한 여행자 신분에 정식을 먹을 순 없고, 고민하다 제일 싼 수프를 하나 시켰는데 빵과 샐러드까지 나왔다. 아침에 차가운 것만 먹었는데 잘 됐다. 통후추를 뿌려 빵을 찍어 먹으니 속이 ㄸ끈 해진다. 같이 시킨 카푸치노는 그새 다 식었지만 나쁘지 않다. 아직 박물관을 다 돌아보지 않았는데 남은 클래식 음악과 피아노 전시를 볼지 말지 고민이다. 지치지 않을 정도로만 해야지 무엇이든. 커피를 다 마셨는데 더 늘어진다.

짧은 설명과 함께 자기가 원하는 악기의 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피아노 전시실에는 피아노의 전신이 되었던 악기들이 많았다. 하프시코드는 피아노보다 소리가 깔끔하진 않았지만, 화려한 그림을 그려 넣고 심지어 건반에 양각을 새겨 화려하긴 했다. 서양 음악에서 피아노는 가장 기본적인 악기로 어디에든 안 빠지는 약방의 감초인데,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배우기 쉽고 음역대가 넓어 그런가?




 왜 이리 피곤한지 모르겠다. 많이 걸어 다녀 그런가 4시도 안 돼 돌아와 쉬었다. 마르는 어제부터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내가 걱정인지, 누구랑 있냐, 어디서 자냐, 뭐 하고 있냐, 물어봤다. 참 착한 친구다. 공부하기 싫다고 갑자기 말도 없이 뛰쳐나온 나에게 괜찮냐고 커피 한 잔 할까 하고는 내가 벨기에로 간다니까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해 준 천사 다니엘도 생각난다. 이렇게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데 왜 그렇게 외로웠을까.


걱정이 많은 친구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하고 다 좋아"라고 보낸 사진, 맥주를 마셔서 얼굴이 벌겋다.





2016년 6월 12일


 오후에는 비가 온단다. 4시 반까지는 기차역에 가야 한다.

 창문 밖의 공기는 서늘하고 하늘은 희끄무레하다. 그래도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닌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간다. 갑자기 도진 방랑벽은 피곤함에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 피곤해 그냥 르네 박물관은 포기하련다. 한참 누워있다가 느긋하게 준비를 한 뒤 나가 행복한 여행객들을 구경하고 와플을 사 먹고 구경만 했던 프랄린을 사서 돌아가야겠다.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발견하는 기쁨은 참 큰데, 브뤼헤가 예쁜 관광명소였다면 브뤼셀에 오니 이 곳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평생을 큰 도시에서만 살아 그런가, 자동차 경적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거나 빨간불 앞에 길게 늘어선 자가용들을 보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고 느낀다. 공원과 분수들이 몇 있었고 흐린 날씨에도 사람들이 많았던 걸 보면 여기에도 '여유로운 삶'이 충분히 정착한 것 같다.





 브뤼셀의 중심 그랑플르 광장으로 걸어왔다. 중간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나도 이제 이 기후에 적응을 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맞고 돌아다녔다.

 호스텔에서 추천한 감자튀김 집에 왔는데 역시 맛있다. 겉이 적당히 바삭한데 속은 부드럽고 은근 달콤한 맛이 난다. 아무데서나 먹었던 브뤼헤의 감자튀김에 실망해 안 먹었으면 아쉬웠을 뻔했다. 여기에 오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오늘은 지난 2일 아꼈던 돈을 마음껏 쓰는 날이 되려나, 프랄린도 샀고 이제 오줌싸개 병따개도 사려 한다. 아침에 호스텔에서 오랜만에 스트레칭을 하고 나왔더니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데도 걸어 다닐만하다. 내일부터 운동을 해야겠다. 몸이 항상 뻐근하니 기운이 없다.

 달리는 차들, 바쁜 사람들, 도시스러운 모습. 일요일이라 상점들은 많이 닫았다. 관광객들이 많은 것은 내가 살고 있는 하이델베르크와 비슷하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지 않아도 여행자들은 티가 난다. 두리번거리고, 조심스럽고, 웃고 있다.

비 오는 날 그랑플르 광장




 핀란드에서 만났던 예린이를 우연히 기차역에서 만났다. 생각지도 못한 우연이 반갑다. 한국도 아닌 벨기에 브뤼셀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오랜만에 한국어로 수다를 떨었다. 그동안 계속 말 걸어오는 다른 여행자들에게도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한국인을 만나는 건 뭔가 다르다.

 예린이와 어머님이 떠나고 쓸데없는 그림들을 끄적거리다, 이제야 DSH 시험이 걱정이다. 후회는 없다.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팔랑팔랑 흔들리던 마음에 좀 중심이 잡힌 것 같다. 그동안 쓴 일기를 읽어보니 참 이유 없이 얼마나 감상적이었는지 보인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벨기에에서는 독일어가 잘 통했고, 사람들이 적당히 친절했고, 잠시 해가 났다가도 흐리고 비가 왔다. 이번 짧은 여행에서 또 한 번 혼자만의 여행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혼자지만 외롭지 않고,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 내가 잊고 있던 것들과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이제 열심히 달려야지.





2016년 6월 15일



 며칠째 계속 비가 온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서 문득 며칠간의 무기력함이 참 쓸데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월요일부터 마르가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겨울에 내가 있으니까 한국어 배우고 싶다며 우리 글씨가 일본어, 중국어보다 예쁘다면서도, 그런데 배워서 어디다 써먹냐고 했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나 보다. 재밌다고 열심히 하는 게 참 귀엽다. 그런데 독일어 공부는 안 하고 수업시간에 한글만 쓰고 있다. 나한테 자꾸 질문을 하는데 너무 웃겨서 수업에 집중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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