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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Jun 14. 2017

소중한 일들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알쓸신잡, 그것은 무엇이기에

신자유주의 시대 정체성 문제를 다룬 파울 페르하에허의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를 읽던 중 엉뚱하게도 나PD의 신작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제목 외웠음..)이 떠올랐다.


페르하에허에 따르면 인류의 문화와 정체성은 정치와 종교, 경제, 예술이라는 네 가지 주요 측면의 상호작용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신자유주의 서사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경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경제 능력주의와 결합하여 "경제적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지적인 업적은 더 이상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실제로, 돈이 되지 않는 지식은 쓸데없는 지식으로 치부되고, 똑똑해도 돈을 못 벌면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는 현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시대의 지식인들이 모여 돈도 안 되는 쓸데없는 지식을 나누며 웃고 떠든다. 심지어 몇 시간째 신나게 떠들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헷갈려한다. 이 아저씨들의 한량 같은 수다가 대체 무엇이기에 첫 회부터 정독하듯이 보게 되냐는 것이다. 식용 장어의 종류는 뭐가 있는지 안다고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도다리쑥국이 언제 제일 맛있는지 안다고 당장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닌데.


사실 앞부분에서 이미 답이 나왔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능력주의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잠깐이라도 피곤한 현실을 잊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잣대로 평가받는다. 경쟁 관계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무슨 일을 하는지,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등 다채로운 기준으로 서로를 재단하고 비교하는 데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가끔은 마치 서로를 머릿속의 저울에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쟁 이후 산업화 초기, 당장 먹고사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던 시절에는 무엇이든 생계유지와 연결되는 지식과 기술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물질적, 외적 가치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산업화되고 상업화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분망한 생활로 빠져들게 한 것은 실상 전적으로 같은 종의 일원들 간의 경쟁에 의해 일어나는 불편스런 발전의 좋은 예이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이른바 관리자 질병인 고혈압, 신장부전증, 위궤양, 그리고 고통스런 신경증에 걸려있다. 
그들은 야만성에 굴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문화적 관심을 가질만한 더 이상의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물을 좀 더 쉽게 다루자는 데 쉽게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콘라트 로렌츠, '공격성에 관하여' 중


사람들은 항상 경쟁을 한다. 꼭 남들보다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도, 남들보다 더 행복해 보여야 한다, 더 멋지게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경쟁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누군가 근사한 곳에 휴가를 다녀왔다거나, 나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갖게 되었다거나 하면 사실 좀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간혹 지나치게 남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것과 비교하고 좌절하는 경우도 있다. 이 또한 다른 형태의 경쟁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산업화가 초래한 불편한 현실과 경쟁, 제한된 선택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야만성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문화적 관심을 가질만한 시간적 여유를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속도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의 모든 소중한 일들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랑, 우정, 숙고, 독서, 호기심, 맛있는 요리.....
서두를수록 정신은 납작해지고, 가슴은 졸아들고, 영혼은 위축된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할 시간이 없고, 그 누구도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할 시간이 없다.
시계 숫자판의 고독한 노예가 되어 우리는 음악에 맞추어 무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 앙리 프레데릭 블랑,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 중


블랑의 소설에서 나열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소중한 일들--사랑, 우정, 숙고, 독서, 호기심--이 쓸데없는 잡지식들로 넘쳐나는 아저씨들의 술자리 수다에 녹아들어 있다. 맛있는 요리와 곁들여져서.



오래전 삼시세끼 정선편에 첫 번째 게스트로 출연한 윤여정 선생이 읊조리던 말이 생각난다.


"나영석은 본질이 사기꾼이야."


서로를 사랑할 시간도 부족해져버린, 언제나 바쁜 사람들로 하여금 잠깐 동안이나마 잊고 있던 소중한 일들을 떠올리고 다시 꿈을 꾸게 만드는 그는 정말 희대의 사기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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