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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Jun 20. 2017

느낀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대한 두서없는 감상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 Susan Sontag<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을 처음 접한 것은 십수 년 전 영상분석론 수업을 듣던 때, 과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로이터 사진전에서 천안문 사태 사진을 보고 문득 이 책이 다시 떠올랐고, 우연하게 서점에서 개정판을 발견하고 충동구매하고 말았다.

 


실제로 발생한 죽음을 포착해 그 죽음을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만드는 일은 오직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혹은 바로 그 직전)에서 곧바로 찍어낸 사진들은 가장 유명하거나 가장 자주 재생산되는 전쟁 사진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P. 93)


위에서 발췌한 부분은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의 정의’, 그리고 ‘죽음의 대량 생산’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사진의 정의’를 중심으로 내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 일치하지 않는 부분, 그리고 새로이 알게 된 부분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한 형태로 바꾸어 놓는다. 순간순간이 모여서 사진 속 이미지의 재료가 되고 이 이미지는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 시시각각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건들, 형언할 수 없는 기억들, 상세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짜인 사물의 표면 등은 모두 이미지의 재료가 된다. 이 재료들이 카메라의 렌즈를 통과하면 가시적인 영원함으로 필름에 기록된다. 이것이 사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진의 정의는 이렇다.


순간을 포착해 영원한 기억으로 만드는 일이 카메라가 하는 일이고, 그 영원한 기억은 사진의 형식을 취한다는 손택의 말은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이미지에 대한 정의와 일치한다. 사진이 다른 영상 매체에 비해 우월한 점이 있다면, 보는 이의 상상력을 증대시키는 데 가장 탁월하다는 것이다. 사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진 속에 포착된 상황의 앞뒤 사정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으며, 영화나 애니메이션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새로이 만들 수 있으며,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다. 같은 사진을 보고도 각자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사진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책에 있는 사진들은 그렇지가 않다. 타인의 고통을 찍은 여러 사진들은 확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내가 갖고 있던 사진에 대한 개념이 맞지 않는 것이다.


골조가 다 드러난 건물들은 거리에 나뒹구는 주검만큼 사람들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다. 자, 봐라. 이 사진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모습이라고, 전쟁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리고 저것도 전쟁이 만든 것이라고. 전쟁은 찢어발겨 산산조각 낸다고, 전쟁은 잡아뜯어 속을 열어 놓고 들어내 놓는다고, 전쟁은 초토화한다고, 전쟁은 팔다리를 잘라버린다고, 전쟁은 황폐화시킨다고. (P. 24)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사진을 보고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영상이란 ‘인간 본성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진들이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P. 74)

 

Eddie Adams, <처형당하는 베트콩 포로> (플리커)


사진이 정치성을 띤다는 문제는 이 책을 통해서 새로이 확인하게 된 부분이다. 알고는 있지만 무시해왔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정치성과 상상력이 서로 충돌하여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끔찍한 이미지가 유발하는 혐오의 감정으로부터 폭격당한 반쪽의 이성이 폐허처럼 남는다. 그 사진이 연출된 것인지 온전히 사실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보는 이미지는 처참하기 그지없고 더할 나위 없이 충격적이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P. 184)


프란시스코 고야, <전쟁의 참화> (위키피디아)


5월 첫째 주 황금연휴, 번갯불에 콩궈먹듯 떠난 제주 여행 마지막 날 들렀던 도립미술관에서는 4.3 미술 아카이브전을 하고 있었다. '기억투쟁 30년'이라는 표제에서 역사에서 묻힌 국가의 잔인성과 잊혀서는 안 되는 비극을 알리고자 하는 처절함이 느껴졌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사회는 진상 규명해야 할 일들이 이리도 많은지...



부끄럽지만 사실 4.3 사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안타깝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한 기록들을 보고 나서 뒤늦게 검색을 좀 해보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되었는지, 꼭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희생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솔직히 지금도 쉽지 않다.


제주 4.3 사건 중 사형을 기다리는 시민들 (위키피디아)


누군가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누군가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워야만 하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끔찍한 현실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고,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현재진행형인 일들이다.


거의 날마다 미디어에는 인간의 잔인한 본성과 국가 혹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끔찍한 일들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넘쳐난다. 그러한 비극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으면서, 인간은 원래 그토록 폭력적인 존재이며 그런 이미지들의 확산이 그 폭력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넘겨왔던 나는 비난받지 않아도 될까? 이제라도 연민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려고 하는 것이 다행인 걸까? 희생자들의 입장에서 오히려 그런 이미지들이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책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아닐까?


일차적으로 우리는 고통의 이미지를 느낄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타인, 아니 나일 수도 있었던 이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더 많은 자각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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