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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Apr 03. 2018

아름다운 걸 또 알아간다

2018 통영국제음악제 <귀향 (Returning Home)>

두어 달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 입에서 '통영국제음악제'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왠지 모르게 그냥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공연 3개를 예매하고, 숙소를 잡고, 휴가를 내고.. 딴에는 제법 즉흥적이었다.


올해 처음으로 가 본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 & 정경화, 리사 피셔 & 그랜드 배턴, 주세페 알바네세 피아노 리사이틀 이렇게 3개의 공연을 보았다.


3/30 개막공연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 & 정경화


첫날은 스티븐 슬론(Steven Sloane)이 지휘하는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Bochum Symphony Orchestra)와 정경화가 출연하는 개막 공연으로 시작. 일찍 예매를 해서 몰랐는데 금방 매진이 되었단다. 정경화라는 이름은 워낙 전설적인 정씨 남매의 일원이라 익히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팬덤이 엄청날 줄은 몰랐다. (그동안 무지했던 거라는 팩폭은 하지 말기로 하자.) 사람도 정말 많고 콘서트홀 옆에 있는 레스토랑도 예약이 꽉 찼길래 원래 이런가 했는데 개막공연인데다 정경화 출연의 효과도 있었던 듯하다.


오케스트라를 2층에서 본 건 처음인데, 훨씬 좋은 것 같다. 공연 전 악기를 점검하러 한두 명씩 왔다 갔다 하는 걸 구경하는 것도 재밌고, 연주 중에는 격정적인 부분에서 현악기 주자들의 활이 물결치듯이 보이는 것도 멋있다.


첫곡은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 조금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클래식에서는 보기 드물게 타악기가 참 돋보이는 곡인 것 같다. 연주 내내 제일 뒤에서 매우 바쁘게 움직이는 타악기 주자들을 보며 참 극한직업이다 싶으면서도 재밌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에 이어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순서에서 그분이 등장했다. 이런 음악무식자마저 바이올린에서도 저렇게 깊은 음색이 나올 수 있구나 하게 만드는, 거장은 거장이었다.


사인회도 있었으나 2층까지 늘어진 줄에 압도되어 새 앨범만 구입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3/31 리사 피셔 & 그랜드 배턴


둘째 날은 보컬리스트 리사 피셔(Lisa Fischer)와 그랜드 배턴(Grand Baton) 공연. 관객 반응으로 보면 단연 음악제 공연 중 최고일 듯.


피셔가 첫 음을 내뱉는 순간, 잠깐이나마 예매를 망설였던 내가 많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허비 행콕 내한공연을 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위대한 뮤지션에게 장르라는 경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재즈가 어떤 자유로운 정신 같은걸 가리키는 말이라면, 팝을 부를 때도, 월드뮤직을 부를 때도, 클래식을 부를 때도, 그는 재즈를 하고 있다. 장르 불문, 취향 불문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구원받은 공연이었다. 


좀 더 오글거리는 말을 한마디 덧붙이자면, 신들린 연주가 아니라, 그가 바로 신이었다.


4/1 주세페 알바네세 피아노 리사이틀


나에겐 마지막 날이었던 일요일, 조금은 차분한 피아노 솔로 공연을 보고 싶었다. 이탈리아의 스타 피아니스트라는 주세페 알바네세 (Giuseppe Albanese), 이미 통영에서 두 차례나 공연을 했다고 한다. 


클래식 피아노 솔로 공연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라, 턱시도를 차려입은 주자의 모습은 어쩐지 조금 시크해 보였다. 공연 소개에서는 드라마틱한 연주와 불꽃같은 테크닉을 보여준다고 했지만, 참 담백한 연주라는 인상을 받았다. 과하거나 모자람이 없이 그가 갖고 있는 것 그대로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옆 자리 관객의 말을 살짝 엿들어보니, 단점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귀에 익숙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쇼팽 환상곡 f단조, 리스트의 '노르마' 회상까지 듣고 나니 불꽃 테크닉이라는 말이 이해되었다. 고난도의 피아노곡 연주를 듣고 있으면 연주자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옛날 작곡가들은 어쩌자고 곡을 저렇게 어렵게 썼을까 싶기도 하다. (왠지 무식한 소리 같지만..) 누가누가 더 연주하기 어렵게 쓰나 경진대회라도 있었는지.


앵콜은 역시 드뷔시, 정말 드뷔시의 해이긴 한가보다. 시크한 첫인상과는 달리, 쏟아지는 박수에 수줍게 웃는 얼굴은 너무도 예쁜 소년이었다. 음악 좀 아시는 것 같은 아버님들은 아낌없는 기립박수를 보냈고, 무려 두 번의 앵콜이 더 이어졌다.


세 공연 모두 티켓값이 전혀 아깝지 않은 (심지어 서울에서 보려면 훨씬 비쌀) 훌륭한 공연이었다. 이렇게 또 좋은 걸 하나씩 알아가는 나 자신이 기특하고, 내년에도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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