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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Mar 04. 2018

피아노로 써 내려간 Open Book

공연 후기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큰 외숙모가 쓰던 타자기가 있었다. 그게 무슨 신기한 장난감이라고 아무 말이나 치며 놀곤 했다.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얇고 기다란 쇠막대기가 엇갈려 일어나며 끝에 달린 글쇠로 하나씩 자모를 종이에 찍어내는 게 재밌었다. 처음 피아노 뒷뚜껑을 열고 건반을 누를 때마다 조그만 솜 망치 같은 것이 현을 두드리는 걸 봤을 때처럼.


그 후로 나에게 피아노는 건반악기도 되고, 현악기도 되고, 타악기도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피아노에 조예가 깊기라도 한 것 같지만 전혀 -_-; 초딩 시절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닌 피아노 학원은 어찌나 지루하던지.. 반 이상은 농땡이부리며 때우고 결국엔 손을 놔버렸다. 사람은 각자의 길이 있는 거니까.)


많은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그렇게 주의 깊게 본 건 아니지만, 프레드 허쉬(Fred Hersch)의 솔로 연주를 볼 때면 유난히 피아노의 80개가 넘는 건반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전부 쓰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하나라도 빼먹으면 서운해하기라도 할까봐 빠짐없이 애정을 다해 쓰다듬어주듯. The Strings에 올라온 인터뷰를 보고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피아노로 다양한 음역을 자유롭게 다루며 다이내믹 역시 섬세하게 가져갈 수 있다. 피아노로 오케스트레이션 효과를 비롯해 노래하듯 건반을 놀리거나 다양한 북소리처럼 표현할 수 있다.

The Strings 인터뷰, <재즈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 (윤진근)


어쩌면 프레드 허쉬에게는 건반 하나하나가 각각의 악기이고, 피아노 한 대는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아닐는지. 모든 건반이 각자의 소리를 내고 서로의 소리를 주고받듯이 연주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것이 아닐까.


지난주 처음 가 본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프레드 허쉬 솔로 피아노 공연이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세 번째로 보는 솔로 공연이었다. 그 전 솔로 공연은 대학로에 있는 JCC 아트홀에서 있었다. 무대와 객석을 포근하게 감싸안는 듯한 JCC 아트홀이 프레드 허쉬의 섬세한 연주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는 소리도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무대에 오를 때 다소 긴장된 얼굴이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가 살짝 걱정이 됐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연주가 점점 풍성해지고 넓은 홀을 꽉 채우는 듯했다. 공연 타이틀이기도 한 <Open Book>과 이전 앨범의 곡들, 'Round Midnight 같은 귀에 익숙한 재즈와 팝이 연주되었다. 내 소양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지만, 중간 이상은 들어야 '아, 그 곡이구나' 할 정도로 프레드 허쉬만의 새로운 음악으로 느껴졌다. (특히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는 많은 이들의 눈물을 훔치게 했다고 한다.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들.. 개인적으로는 Wouldn't It Be Loverly라는 곡이 뭉클했다.)


좋은 연주자는 그 악기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프레드 허쉬는 피아노를 가장 예뻐 보이게 한다. 뭔가 성숙함을 담고 있는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여물지 않은 순수함이 떠오르는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재즈든 팝이든 프레드 허쉬라는 고요함에 흠뻑 물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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