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도 몰랐던 나

by 메밀

2025년의 마지막 달,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유니폼까지는 아니지만 정해진 드레스 코드를 따라야 하고,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를 입고 일하는 곳. 그렇다.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카페 일을 시작했다. 수년간 사무실에 앉아서 하는 비교적 편한 일만 해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냥 해보고 싶던 일이다. 3년 전쯤 지인의 한마디에 이끌려 주말반 학원에 다니면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을 때는 그저 막연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한데 작년 여름 다니던 사무실이 갑작스레 문을 닫는 바람에 자동으로 퇴사해 버렸고, 그동안 해왔던 것과 똑같은 일은 왠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은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재취업을 위한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애매한 통장 잔액과 실업 급여를 까먹으며 한량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새로운 일을 찾아보려고 이것저것 건드려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뒤늦은 직업 탐방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왜 남들처럼 꿈이라는 것이 없을까, 이 나이 먹도록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 정상인가,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겉으로는 무심해 보였지만 이런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여하튼 그러다 어찌어찌하여 이렇게 수습 바리스타라는 위치에 와 버렸다.


닉네임은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준’이라고 지었다. 원래는 다른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출근 직전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게 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생일이 6월이라 영문으로는 ‘June’이라고 하면 어쩐지 있어 보이는 것도 같고.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매일 불리게 될 이름이라 내가 들어도 오글거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어쨌든 다소 즉흥적으로 정한 감이 없지 않다.


근무를 시작한 지 2주 차에 접어드는 화요일에는 첫 회식에 참석했다. 조금은 이른 저녁인 다섯 시 반부터 숙성 목살로 유명하다는 청담역 근처의 고깃집에서 시작되었다. 대략 한 달 전부터 예정된 온라인 에세이 모임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해서 회식은 1차만 참석할 수 있다고 미리 이야기했다. 비교적 젊은 분위기라 그 어떤 눈치도 주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 점장님이 저녁에 무슨 약속이 있냐고 묻기에, 온라인으로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다고 대답했다. 문학을 전공했다는 점장님이 반색을 띠며 말했다.


“준은 그러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거네요!”

“어, 그러네요?”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여 얼떨결에 대답했다. 카페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일하게 되었고, 가끔은 글도 써서 올리고 있다. 읽고 싶은 책도 읽고, 낙서 수준이지만 드로잉도 찌끄리다가, 새로운 언어도 배우고……. 얼마 전에는 장롱 구석에 20년 넘게 처박혀있던 수동 카메라를 꺼냈다. 고등학교 시절 사진반에 들어가면서 남대문에서 미개봉 중고로 산 미놀타 X-300. 충무로까지 가져가서 클리닝 싹 하고, 통영에서 찍은 첫 번째 필름을 현상했다. 실로 드넓고 얕은 취미 부자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조금씩 깔짝거리기만 하면 뭐 해, 결과물이 하나도 없는데.’라며 불평만 늘어놓기 일쑤였다. 뭐라도 결실을 보아야만 한다는 어리숙한 욕심에, 뭘 끝까지 해본 적이 없다며 자신을 깎아내리기만 했다.


그런데 점장님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마흔이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고 말한 거 누구냐, 걸리면 가만 안 둬.’라며 벼르던 지난날의 앙금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입사 3주 차, 아직 정신이 하나도 없고 익혀야 할 것은 산더미인 데다 퇴근하면 등허리가 뻐근하다. 그래도 뭔가 처음으로 일다운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퀘스트를 하나하나 클리어하는 타이쿤 게임 속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최종 보스를 해치우는 그날이 올 때까지 고되고 보람찬 나날을 즐겨보련다.


*불혹(不惑): '아닐 불(不)'과 '미혹할 혹(惑)'이 합쳐진 말로, 나이 40세를 가리키며 세상일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미혹되지 않고 판단력이 뚜렷해진 상태를 뜻함. 논어에서 공자(孔子)가 "나는 40세에 미혹되지 않았다(四十而不惑)"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공자님 천국에서 만나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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