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말이 싫어

따뜻하게 철들기 프로젝트

by 메밀
조만간 얼굴 보자
언제 밥 한번 먹자
좋아 좋아
난 오늘도 기다려

… 중략 …

빈말이 난 이제 싫어
빈말 이젠 정말 싫어
텅텅 빈 하트같이 공허한 그 말

- 백아연 <달콤한 빈말> 중에서


빈말이란 그렇다. 혹자는 사회생활의 윤활유라고도 하는, 그저 의례적으로 던지는 일명 ‘좋은 사람 코스프레 (내가 만든 이름)’ 할 때 필수인 듣기 좋은 인사말. 겉보기에 알록달록 화려해서 눈길을 사로잡고 입안에서는 한없이 달콤해서 자꾸만 먹고 싶어지는, 하지만 영양가는 거의 없는 불량 식품 같은 그 말.


지금보다 더 어리숙했던 시절, 나는 빈말과 진심을 잘 구분 못하는 사람이었다. 달콤하지만 공허한 빈말을 과다 섭취한 나머지 혼자 상처받고 급기야 상대를 미워하기에 이른 상큼한 음성의 소녀처럼. 예전에 봤던 한 토크쇼에서는 “언제 한번 보자”라는 말에 “그래? 언제?” 하면서 다이어리를 꺼내 들고 날짜를 정하려는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하며 깔깔 웃어대기도 했다. 그게 그렇게 놀려댈 정도로 어수룩하고 눈치 없는 건가…. 반에서 잘 나가는 애들끼리만 어울리며 아무나 끼워주지 않는 광경이 눈꼴신, 시쳇말로 아싸가 된 것처럼 괜히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아싸이기도 했다는 슬픈 이야기….)


만나는 사람마다 빈말을 습관적으로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곧잘 인간관계를 ‘관리한다’라고 표현한다. 전화번호부 용량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연락처를 재산으로 여기며 툭하면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는 사람들, 나름의 기준으로 지인들을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난 아무한테나 먼저 연락 안 해’라는 듯이 구는 사람들. 물론 이것은 까칠한 아싸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빈말을 빈말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사람도 만난다. “조만간 보자”라고 지나가듯이 한 말에, 그 자리에서 부담스럽게 일정을 잡자고 드는 게 아니라 적당한 때가 오면 은근한 연락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는다. 상대가 한 말을 가볍게 흘려듣지 않지만, 부담도 주지 않으려는 섬세한 센스와 따뜻한 배려가 느껴진다.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어른스러운 사람들이다.


언젠가 <나 혼자 산다> 박천휴 편에서, 집에 놀러 온 미국인 작곡가 윌 애런슨이 배우 박진주에게 ‘좋은 노인’이 될 것 같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의 서툰 단어 구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좋은 어른’이라고 할 때와 또 다른 느낌이다. 훨씬 더 상대를 배려하고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온화하고 인자한 어르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말을 들은 박진주는 나이 드는 것을 더 기대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과연 나이 드는 것이 기대되나, 그저 두려운가. 매년 꼬박꼬박 챙겨 먹은 그 많은 떡국은 진정 두둑한 뱃살만 남긴 것인가 싶어 울적하던 차에, 좋은 노인이 되기 위한 행동강령의 첫 번째 조항을 적어본다. ‘빈말을 빈말이 아니게 만드는,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