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삶

번아웃 극복기

by 박초록

사실 지난해 하반기에는 많이 무기력하고 사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풀타임 근무를 하면서 너무 소진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사는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의미가 없고, 짜증이 잘 나고, 감정 조절이 안되고. 절제가 어려워 참지 못하고 많은 소비를 하고 , 몸이 좋지 않은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운동도 안 하고. 이 시기에 퇴사도 많이 생각했다. 더 이상 여기에서 일하는 걸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다행히 위에 언급한 부분이 많이 안정화되고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하하). 그 당시에는 내가 내담자들에게 수없이 적용하는 행동활성화 기법들도 별로 하고 싶지 않고 소용이 없게 느껴졌다. 번아웃이라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그러다가 바닥을 치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던 몇 가지 계기가 있는데. 가장 시작점에 있는 것은 책 한 권이었다.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라는 이두형 선생님의 책인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심리치료이론 중 하나인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CT)'에 대해 친절하게 풀어쓴 따뜻한 책이다. 거기서 말하는 건 원래 삶은 힘든 것이고 다양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이니 잘 다독이며 받아들이고 나의 가치에 전념하며 함께 가야 한다는 것. 이를 통해 나의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을 전에는 몰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심리치료를 하게 되면서 '인생은 苦'라는 불교철학에 너무나 깊이 공감을 하며 내담자들에게도 전달하곤 하였으나 내가 힘든 순간에는 허우적거리느라 그 당연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저항하기만 했다. 이래서 가장 힘들 때는 손잡아주고 꺼내주고 주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한가 보다. 그래 원래 출근하는 건 힘들지,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들지. 그렇지만 그 과정에 힘든 것만 있었나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었다. 안보였을 뿐.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따뜻함과 사랑, 보람과 성취감, 매일 출근하는 루틴에서 오는 안정감, 정기적인 경제적 보상, 회사 근처에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어서 맛있는 디카페인 커피도 마실 수 있지. 또 집에서는 아이들의 치명적인 귀. 여. 움., 주말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일주일치 도시락 싸기 등등.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하는 시간을 실제로 줄이면서 심리적, 체력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최고의 출산육아지원 정책은 일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리고 두 번째이자 현재 진행형인, 새해 들어 요즘의 가장 큰 낙과 기쁨이 되는 것은 바로 기록하는 삶. 원래도 MBTI의 J인 계획형인지라 엑셀표 만드는 걸 좋아한다. 여행 갈 때 특히 빛을 발하고 친구들이 공유해 달라고 할 정도. 그러면서도 글을 쓰거나 기록하는 건 참 못했다. 남들은 다이어리도 잘 쓰고 독서록도 쓰고 육아일기도 잘 쓰던데 난 왜 뭐가 그렇게 항상 바빴는지. 지나고 나니 흘려보낸 아이들의 말, 행동들이 너무 아쉽다. 첫 번째는 가계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난해말에는 스트레스가 크다 보니 내일이 없는 것처럼 돈을 썼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 싶어 연간, 월별로 수입, 저축, 소비(고정비, 생활비)를 나누어 하나하나 기록하게 시작했다. 아이에게 6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준 것까지 빠짐없이. 월에 식비로 얼마가 나가는지도 모르고 살았다니 너무 부끄럽다. 그렇게 1월 한 달을 적다 보니 꼭 필요한 것만 사는데도 돈이 꽤 나가는구나, 예상치 못한 일들과 지출도 많이 발생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건강 기록. <갱년기 리셋>과 <여자X단식>을 쓴 민디 펠츠의 책을 읽으며 세상에 여자로 살면서 여자의 몸을 너무 몰랐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고, 크게 동기부여가 되었다(주로 책을 통해 영감을 받는 편). 그래서 간헐적 단식도 하고 생리주기에 따른 식단조절도 해봐야지 하면서 내 몸에 대한 공부를 하니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엑셀에 오른쪽으로는 한 달 치 날짜를 쓰고 세로로는 먹은 것, 영양제, 운동여부, 체중, 체지방률 등등을 매일 기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했더니 기록하고 체크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다. 데이터가 쌓이면서 목표하는 체지방률을 가질 수 있게 되면 너무 뿌듯할 것 같다. 세 번째는 일상 사진 기록.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좋아해서 사진을 많이 찍는데 핸드폰에 묵혀둔 지난 사진이 너무 많다. 물론 다시 열어볼 수는 있지만 부모님과 지인들도 같이 공유하고 나도 쉽게 볼 수 있도록 매달초에 지난달 사진을 블로그에 포스팅하기로. 그리고 네 번째는 아이들 그림 기록. 첫째는 워낙 그림을 잘 그리고 좋아했고, 둘째도 누나를 따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뭐든지 거침없이 쓱쓱 그린다. 이 시기의 날 것 그대로의 아이들 그림을 너무 사랑하고 좋아해서 이것도 꼭꼭 사진 기록으로 남겨두기로. 이렇게 기록을 하다 보니 좋은 점은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로 끊어서 살게 된다는 것. 일상이 그냥 마냥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의 행렬이 아니라, 한정된 단위로 나눠지니까 불필요한 미래를 생각하지 않게 되고 지금에 집중하게 된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쓰기 기록. 브런치를 시작하고 그동안 그냥 흘려보내던 생각과 경험들도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의 힘이야 치료에도 활용하고 있고 너무나 잘 알고 있지.

번아웃에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을 수 있고 원래 삶은 고통이지만, 너무 실제로 무리하고 있진 않은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조절하기를 권하며, 내가 좋아하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전념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다. (전문가의 개입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인생은 너무 큰 단위이고 '왜 사는가' 같은 생각은 작은 미물에 불과한 나에게는 너무 버겁게 느껴지니 더 작은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로 쪼개어 작은 목표를 정하고 그 과정을 추적하고 기록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기쁨을 주고 하루를 꽉 채워준다는 얘기도 덧붙이고 싶다. (목표달성도 좋지만 기록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인 것이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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