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와 공감 vs 논리와 계획
사람마다 각자의 마음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르게 생겼다. 같은 상황이어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얼마든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서로 다른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가 사람 사이에 중요한 마음가짐이다. 직장 안에서, 친구 사이에서, 특히 가족 안에서.
둘째가 이틀째 녹색변과 함께 변비가 생겨서 걱정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일정상 외부 회의 중에 부재중 2건 후에 받은 전화를 통해서 다급하며 다그치는 아내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여보, 분유가 2단계였어”
“아 그래? 나도 그 확인을 못해봤네”
“언제 올 거야?”
“나 이거 최대한 빨리 마치고 갈게. 3시까지 가면 될까?”
“뭐? 거기서 뭐 하는 건데?”
“내가 정리한 거 얘기만 하고 바로 갈게. 가면서 분유 사갈까?”
“내가 새벽배송으로 샀어”
“알았어 마치기 전에 얼른 갈게”
텍스트만 봐서는 못 느낄 수 있겠지만 아내의 감정이 차갑게 고조되어 있었고, 나는 집에 가서 아내와 대화할 때까지 아내가 고조된 감정의 이유를 몰랐다. 이제 3개월이 갓 넘은 아이가 6개월 이후의 분유를 먹으니 소화도 안되고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하지만 내가 집에 가도 당장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회의 중간에 양해를 부탁하고 나와서 집으로 향했고, 집에 가자마자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아이랑 놀아주고 집안일을 했다. 아내가 같이 하자고 하던 매트 재단도 1주일째 못하고 있으니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얘기하고선 아내가 일정이 있어 1시간 남짓 나간 사이에 후딱 해치우고, 거실도 치우고 밥하고 첫째 밥도 먹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상기된 얼굴로 매트가 저렇게 될 수밖에 없었냐며 불만족한 감정으로 밥은 먹고선 서로 상하는 감정과 함께 짧은 대화가 마무리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도 해놓고 불만을 듣는 것이 불편하다. 아내가 화난 이유는 분명 매트 때문 만은 아닌데 기분을 맞춰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불만을 듣자 피로감과 억울함이 몰려왔다.
다음날 우리는 대화를 하며 서로가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내는 출산휴가 동안 아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가 최우선이 되길 기대했던 것 같다. 분유가 2단계였던 것도 속상한데, 내가 더 세심하게 봐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서운했었다. 아내의 우선순위는 당연 아이들이었다. 남편은 육아휴직하고 첫째 주에 아내가 쉬는 날이라고 바로 외부 회의를 다녀오는 것에 기분이 불편했다. 더군다나 바로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몇 시까지 가면 될지 되묻다니.
나는 육아휴직을 총 40개월을 쓰는 만큼 현재 직업 외에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너무 앞섰고, 그러기엔 18개월이 너무 짧아 보였다. 학부도 4년을 하고 최소 석사도 2년을 해야 방향이 정해지는데, 18개월은 다급한 일정으로 다가왔고 속마음은 두려웠다. 나의 우선순위는 아이들이 아닌 방향이었다.
서로의 우선순위는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방도 동의해 줄 것으로 암묵적으로 기대하고 있었고, 그 기대가 깨어진 순간 그 파편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깨진 마음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서로의 시선을 달랐지만 그 다름 덕분에 아내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또 중요한 것은 아내는 위로와 공감의 언어지만, 남편은 논리와 계획의 언어이기에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 변비의 원인을 알아서 다행이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통화 후 바로 가지 않아도 되겠다며 대화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 감정의 온도가 달라서 속상했었다. 아이가 아프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와주길 바라고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힘들어하는 아이와 함께하고 있는 본인이 위로를 받기 원하고, 속상한 감정을 공감해 주길 원한다.
아내에게 너무 고마웠던 건 당일에 감정 상했더라도 자고 난 다음날 담백하게 감정을 얘기해 줬다는 것이다. 왜 감정적으로 말했는지, 서운했던 것은 무엇인지 정리해서 표현한다. 그 덕에 나도 서운했던 것을 담백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 불필요한 감정적인 대화를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은 이렇게 장황하게 적을 만큼 큰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언어의 차이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와 나는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이 분유 한 통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아내와 내가 얼마나 다른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려주는 신호였다. 우리 가족은 함께 걷는 길에서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