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리셋버튼

by 걷는 아빠

RPG게임을 하면 직업을 고르게 되어있다. 전사 마법사 궁수 드루이드 등 여러 직업이 있고 직업을 고르고 나서도 어떤 스킬을 배우고 어떤 스탯을 키우며 성장할지는 거의 매뉴얼처럼 되어있다. 혹여나 스킬을 잘못 누르더라도 리셋을 도와주는 캐시 아이템이 있다. 그렇게 캐릭터를 잘 키우는 방법은 정석화되어 있다. 내 현실판 캐릭터는 어떤가. 지금은 중구난방으로 스킬을 찍은 것처럼 어중간하게 성장해서 망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현실에선 리셋 아이템을 구할 수도 없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공대를 전공했지만 1년간 휴학하고 해외봉사를 다녀오고, 전공 프로젝트보다는 인성교육과 국제개발 경험이 많았기에 학점도 낮았다. 변리사도 관심 있어 공부도 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공대를 살려 평범하게 취업했다.


제품개발 업무를 하면서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나니 나는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5년 차에 마침 육아휴직을 하게 되면서 못했던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변리사 시험을 1년간 공부했다. 노력으로 시작하면 무엇이든 될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1차 시험이 다가오면서 육아병행으로는 그것이 자만이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선택을 되돌릴 수 없었다. 겨우 과락을 면할 정도로 시험을 마치면서 커리어만 봤을 땐 1년이 무의미하게 소비되었다.


그 후 잔여휴직 10개월은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시간에 대학생 때 알게 된 인성교육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교육부 인증 중등인성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현재 커리어와는 전혀 다른 일이고 수입도 없었지만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10개의 수업을 만드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수업테스트와 인증서 취득까지의 과정을 겪으며 내 현재 커리어와는 전혀 관련 없는 경험을 얻었다.


그렇게 1년 10개월 만에 복직을 하면서는 제품개발이 아닌 다른 일을 하기로 다짐했다. 사내에서 직무이동 공지가 나와서 바로 지원했고, 그렇게 이동한 후 8개월 만에는 난 그 업무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20년 뒤는 너무 멀고 10년 뒤엔 어떤 일을 하고 있어야 할까. 일단 나의 옵션 중 변리사는 지워졌다. 현재의 나를 보니 중구난방 애매한 캐릭터가 되어있다. 나에게 리셋 아이템이 있으면 좋겠다. 커리어를 정리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고 싶다. 내 마음은 진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아내에게 표현했던 '회사에서 최고로 성장하겠다'라는 말은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나 아니면 차선책을 최선책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던 것인가.


일하면서도 어려운 것들은 적어봐야 정리가 되듯, 지금 내 마음을 정리할 때도 역시 글을 적어봐야겠다. 과거의 나부터 적어보자.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리될 것이다. 나만의 리셋버튼을 누르기 전 내 스탯을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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