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조직을 뒤로하며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첫 1년 10개월의 육아휴직은 내게 쉼이 아니라 발돋움이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 있는 조직에서 이동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리됐다. 복귀한 개발조직에서는 나에게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주어졌고, 덕분에 글로벌 대형고객도 대응하고, 대형모델 개발도 하면서 재밌었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조직이동에 자신감을 더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본사 조직으로 이동했다. 처음 본사조직으로 이동했을 때의 환희는 나에게 아드레날린을 머리끝까지 만들어줬고 출근할 때마다 감사를 만들어줬다. 서울 서쪽에 사는 나에게 출퇴근은 4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었고, 덕분에 아이의 아침을 차려주고 때때로 등하원을 시켜줄 수도 있었다. 둘째 임신을 한 아내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기에 행복도 채울 수 있었다. 본사조직에 왔다는 것만으로 주변 사람들이 축하해 줬다. 특히 어머니는 아들자랑에 바쁘시고, 친구들의 축하와 함께 기존 부서 동료들의 부러움도 샀다.
현 조직으로 이동하면서 제품개발 경력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서류전형 면접전형을 차례로 통과하며 대단한 곳에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긴 화장실부터 향기가 나는구나. 경기도 외딴곳에 있던 공장 화장실과는 확실히 다르게 운영하는구나. 화장실 가운데 디퓨저가 놓여있었고 화장실을 갈 때마다 은은한 향이 퍼졌다. 나중에 회사에서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이 향을 떠올리며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들뜬 마음으로 8개월을 보낸 현재, 느티나무 향기가 나지 않는다. 업무의 회의감보다 크게 작용한 것은 조직문화였다. 세대 간 관점 차이가 반복되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시되는 경험이 많아졌다. 이상적으로 문제제기, 전략수립, 전략실행 3가지를 전부 다루는 업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에 타 부서와의 협업이나 시장조사, 전략 기능은 매우 적었으며 보고시즌이 오면 단시간 내에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보고용 전략'을 갑작스레 만들어내고, 실행이나 피드백 없이 흘려보내는 과정은 마치 팝업스토어 같았다. 잠깐 주목받더라도 시간이 지나며 기억에서 잊혀간다.
나는 그 초기 작업에 출산휴가를 바치고 복귀했을 땐, 다들 보고자료 준비로 예민한 분위기였다. 미안한 마음에 아내와 두 자녀를 뒤로하며 나름 야특근을 하며 함께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내의 SOS에 보고 직전 이틀간 10시 12시에 퇴근하는 남들보다 먼저 저녁 8시 반, 10시 반에 퇴근했고, 보고당일 연차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는 내가 담당하는 컨텐츠는 만들었으나 글맵시가 마무리되진 못했다. 누구보다 집중해서 많은 양을 만들어냈지만, 마무리를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만 남았다. 업무의 결과가 아닌 마지막 인상 하나로 평가받는 현실은 익숙하지 않았다.
좋은 이미지를 쌓을 수 있다는 기대에 반해 아쉽게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경험 덕에 나의 기대를 현실적으로 조율하였고 이 조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이 조직은, 개인의 자율과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보다 권위와 전통이 우선시되었다. 새로이 무언가 창출하려는 것보다 전통을 유지하는데 무게가 실려있다.
나에게 향기로 기억되었던 이곳은 이제 느티나무 향이 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내 삶 속에서 나만의 향기를 다시 찾아 나서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