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기쁨은 술어일 수 없다. 기쁨은 언제나 주어다. 내가 기쁜 것이 아니다. ‘기쁨이’ 내게 온 것이다." _이종태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과 몇 개월을 떨어져 지낸 적이 있다. 당시 수유리에서 간판업을 하던 부모님이 신당동에 작은 슈퍼를 연 것이다. 누나와 나는 사정상 바로 전학을 가지 못한 채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던 삼촌네 가족과 한두 달을 함께 지내야 했다. 당시 내 눈은 아홉 시만 되면 자동적으로 취침모드로 전환되었는데, 그런 까닭에 며칠에 한 번 장사를 마치고 밤늦게 찾아오는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번번이 놓치곤 했다.
다음 날 잠에서 깨면 부모님은 이미 돌아간 뒤였고, 머리맡엔 이런저런 과자와 두툼한 초콜릿 몇 개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평소에 잘 먹지 못했던 과자와 달달한 초콜릿을 먹는 것으로 달래야 했다.
인생의 상실과 고통의 순간 가운데 찾아오는 작은 위로의 선물은 현재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곤 한다. 물론 그 선물들이 내가 느꼈던 헛헛함, 그 여백들을 단번에 채워 준 것은 아니지만, 삶의 마디를 다시 이어 주는 끈으로 작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결혼하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아빠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주치의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사실 거라고 했다. 다른 암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빠는 항암치료를 시작했고, 여섯 달쯤 지났을 때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 지났을 즈음, '기쁨이'가 우리 곁에 찾아왔다. 6년 전 쓴 일기에는 그때의 감격과 설렘이 담겨 있다.
기쁨이 온다! 이제 갓 석 달이 지난 태아의 이름을 ‘기쁨이’로 지었다. 때때로 초음파 사진으로 그 형체와 모습을 신기하게 들여다보겠지만, 아직 우리는(그리고 그가 마주할 세상은) 아이를 만나볼 수 없다. 이 겨울 가고 봄이 찾아오면, 그가 미지의 문을 빼꼼히 열고 우리에게 올 것이다. 고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 시작될 바로 그날. 기쁨과 슬픔이 그러하듯, 생과 사의 문은 그렇게 이웃집 담처럼 늘 우리 곁에 마주하고 있다. 기억 속의 '그'가 다가올 시간 속의 '그'와 만나 서로의 어깨를 살포시 토닥인다.
G. K. 체스터턴은 우리가 마주하는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물을 엄청나게 가벼운 천사들보다 더 가볍게 대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별이 빛나는 침묵의 방에 앉아 있다. 하늘의 웃음소리는 너무나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하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쁨의 소리가 엄청나게 크기에 오늘 내가 흘리는 눈물이 특별하면서도 작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쁨이가 우리 곁에 온 순간만큼은 그 하늘의 소리가 어렴풋하게나마 들리지 않았을까.
일 년 후, 아이가 태어나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스탠드 조명 속에 잠든 아기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봐 아기, 너는 어디서 왔니?"
위의 그림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아내가 태교의 일환으로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어린왕자 그렸네. 이거 나야?"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