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정말 정확하기도 하다. 낮에 잠시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갔다 봄바람을 만났다. 매섭게 뼛속까지 뚫고 들어오던 기세는 온 데 간 데 없고,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간다.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달력을 보고 미리 알고 있었지만, 철이 바뀌는 것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밤을 헤맨다. 분명 눈을 감았는데 반짝이며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인다. 그 빛은 점점 선명해지는 듯하다가 다시 멀어진다.
이 모습은 마치, 내가 보았던 바다와 닮았다. 바다 위에서 산산이 부서지며 사그라들던 빛을 본 적이 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빛들은 어느새 파도에 일렁이며 다시 빛으로 떠오르고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빛은 사라지지 않고 바다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나의 기억들도 그저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오늘처럼 잠들지 못하고 밤을 헤맬 때면 어김없이 기억의 조각들이 수면으로 떠오른다.뒤엉킨 기억의 조각들 속에 던져진 난, 자주 길을 잃어버린다. 그때마다 어떤 조각은 나를 찌르고, 또 잘 못 건드린 조각에 베이기고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 상처뿐인 기억, 행복했던 순간 시간이 멈추어주길 바랐던 기억, 설렘으로 가득한 기억,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수치스러웠던 기억, 절망의 끝에 매달렸던 기억, 비겁하게 도망갔던 기억, 감추고 싶었던 비밀 등 수많은 순간들이 반짝이며 밀려 올라온다. 그리고 이제야 그 기억 속의 나에게 물어볼 용기가 생겼다.
'왜 난 그렇게 밖에 행동하지 못했지?' '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화내지 않았지?'
억울하다가 화가 났다가, 슬픔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다시 오지 않을 행복한 순간이 그리워 심장이 아려온다.
이렇게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가능하긴 하다. 선택적으로 생각을 안 할 능력도 가지고 있으니까. 단, 계속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떠오르게 되니, 그때는 바라보는 게 배로 힘이 든다. 그래서 주위에서 종종 "별거 다 기억하고 있네", "아직도 그걸 담고 있었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렇게 예민하고 속 좁은 사람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그럴 때면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이건 그들 잘못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이 여전히 나를 찌르고 아프게 할 뿐이다. 아직 삼켜야 할지, 뱉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목구멍에 걸려 상처를 내니 고통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영원하지는 않다. 내가 뱉을지, 삼킬지 결정을 하고 나면 잠시 머무르다 다시 가라앉는다. 이렇게 나를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기까지 참 많이도 괴로워했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고 몇 번이고 도망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먼 길을 돌아서 지금에 있다.
이제는 안다.
반짝이며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 지금의 나는 이 조각들로 만들어졌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완성되지 않은 퍼즐 조각처럼 모두 필요한 기억들이다. 고통도, 행복도 똑같이 빛나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도 빛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통의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았을 때, 내 삶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순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 주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나는 빛나는 모든 순간들을 통과해 왔고, 앞으로도 빛나는 순간을 온몸으로 기억하며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