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을 거닐다 Mar 05. 2020

마스크의 신비한 여행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넘기는 방법

2020년 3월 1일 기록


#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던 중 고산병이 왔다. 저녁부터 밤새도록 속을 게워내고, 두통에 시달렸다. 그날 묵은 롯지(산장)에서 처음 만난 대만 친구인 클레어가 내 탈수 증세가 걱정된다며 가지고 있던 낱개 포장 포카리스웨트 분말을 한 움큼 나눠주었다. 너무 많이 주는 것 같아 하나만 줘도 괜찮다고 하니, 자기보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 거 같다며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토하느라 정신은 없었지만,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부족한 물자를 나누어주는 클레어에게 찡한 감동을 느꼈다.


# 한국에서 중국으로

마스크 품귀현상이 일어나다 보니 ‘왜 중국으로 마스크를 보냈냐’, ‘대한민국 정부 맞냐?’라며 날 선 비난이 쏟아진다. 불안한 심리에 누구라도 비난하고 싶은 마음까지야 이해하지만, 각종 음모론과 대통령 탄핵의 근거로까지 삼는 형국이다.


# 중국 상하이에서 대구로

그런데 며칠 전 중국 상하이에서 대구로 마스크를 보내온 뉴스를 봤다. 어떤 페친의 링크로 본 기사인데, 이런 뉴스는 잘 전파되지 않는다. 앞서서 다른 포스팅에 썼던 것처럼 이런 긍정적이고 비자극적인 뉴스는 공포를 유발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를 활성화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의 관심도 덜 끌고, 그러다 보니 전파력도 약하다. 게다가 (또는 그래서) 현재 뉴스 플랫폼인 대형 포탈에서는 이런 뉴스를 메인에 띄워놓지도 않는다.



상하이에서 대구로


날짜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마스크 및 구호물품을 보낸 것은 1월 말경이다. 우한 교민을 이송해 올 전세기 편으로 민/관 합동으로 마련한 물품을 보냈던 것이다. 당시 한국 확진자는 단 4명뿐이었고, 심각한 단계가 아니었다. 당시 나는 마스크를 안 쓰고 다녔으며, 주변에도 마스크를 쓴 사람보다 안 쓰고 다닌 사람들이 더 많았다. 당시에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심각한 수준이 될지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반면에 중국 우한은 확진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던 심각한 위기 상태였고, 그러기에 우리 교민들을 전세기로 데려와야 할 상황까지 됐던 것이다. 당시 우리는 마스크 수급에 문제가 없었고, 중국에서는 마스크가 시급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제 상황이 반전되어 대구가 우한처럼 되었다. 확산의 원인과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앞서 현재 상황에서 대구와 경북 주민들의 공포와 불안이 얼마나 심할까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 마스크와 각종 구호물품이 절실할 것이다. 2월 27일자 뉴스에서 보도된 바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구로 마스크 50만 장을 보낸다고 했다. 중국은 상황이 나아지고 있는 추세로 보인다. (통계 조작이라든지 이런 건 차치하고) 그들도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발생 중에 있지만, 한숨 돌린 모양새다. 그러다 보니 아직 마스크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더 시급하고 위급한 대구로 물자를 나눠줄 수 있는 것이다.


# 대구에서 우한으로

알고 보니 2월 초 대구에서도 우한에 마스크를 긴급 지원했었다. 대구와 우한은 우호협력 도시라고 한다. 날짜를 보니 2월 2일이다. 이때만 해도 대구는 코로나 청정도시였을 것이다. 감기 걸린 사람이나 마스크를 쓰고 다녔겠지, 마스크가 지금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 필요한 곳으로 물자를 나눠준 것이다.

대구에서 우한으로


# 대구에서 광주로

마스크의 이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2월 12일 대구시에서 광주로 마스크를 전달한다. 이른바 ‘달빛동맹’! 이름 한번 멋지다. 달구벌의 ‘달’과 빛고을의 ‘빛’이 합쳐져 ‘달빛동맹’이란다. 뭔가 판타지 무협 소설에 나올 법한 느낌의 이름이다. 2월 4일을 기점으로 광주에도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때만 해도 대구는 확진자가 없었다. 달빛동맹의 전사답게 물품이 더 시급할 광주에 마스크를 전달한다.


대구에서 광주로


# 광주에서 대구로

자 이제 다음 스토리는 말하지 않아도 감이 올 것이다. 달빛으로 맺은 동맹인데, 지금 대구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광주에서 가만히 있을소야. 때는 2월 20일 대구 첫 확진자가 나오고 하루 지난 날이다. 대구는 확진자 추세가 심상치 않네. 달빛동맹의 힘을 보여주마~~ 마스크 발사!!!

그리고 오늘 뉴스가 나왔다. 대구 병상의 부족에 대응해 광주에서 대구 환자를 수용하여 치료하겠다는 결정!! 역시 빛나는 달빛동맹!! 지역감정은 무엇? 어디에?


광주에서 대구로


달빛동맹



# 다시 안나푸르나

그날 고산병 때문에 정상(엄밀히는 베이스캠프)까지 못 가게 될까 속상했는데, 클레어 그리고 그날 롯지에서 만난 다른 트레커들의 온정의 손길 덕에 말끔히 나아 힘찬 발걸음으로 정상까지 잘 올라갔다. 산에서야말로 물자가 제한되고 희소하다. 아직 트레킹 코스가 많이 남아있기에 나에게 포카리스웨트 분말을 나눠 준 클레어도 언제 비슷한 증상이 와서 탈수 증세가 올지 모르는 일이었을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어는 당장 위급한 나에게 자신의 소중한 물품을 나눠준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그런 물품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나에게 나눠주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https://brunch.co.kr/@walkinmind/16)


신기하게도 산에서는 이런 나눔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 비밀이 뭘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연대(solidarity)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산에서는 처음 본 사람도 나와 상관없는 타인이 아니다. 함께 길을 걷고, 같은 목표를 나눠가진 동반자이다. 어느 산이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산은 크다. 산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미물이다. 산을 오르면 겸허해지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산 앞에서, 산속에서, 산 위에서 우리는 미물로서 만나게 된다. 서로에 대해 동질감을 갖고 일종의 동지애가 쉽게 싹트게 되는 환경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산을 오르며 연대감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어느 때보다 나눔과 베풂을 실천한다. 역설적이게도 탁 트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산이라는 막힌 공간, 그래서 위험에 빠졌을 때 서로만이 도움의 클러스터가 될 수 밖에 없는 특수성이 연대의식을 더 고양시키는 것 같다.


# 연대의 클러스터 (feat. 달빛동맹)

불확실성의 특성을 온전히 안고 있는 신종 감염병 때문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이 증폭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연대’의 클러스터를 믿고 확장시키고 발동시키는 것만이 불안을 감소시키고 생존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세력이나 집단의 보이지 않는 힘과 영향에 의해 겉으로는 싸우고 있었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연대해 오고 있었다. 달빛동맹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우리는 가짜 뉴스에 끌리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