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이 말했다, 여러분은 이미 태어난 것으로 삶의 목적을 다 완수한 것이라고. 가장 어려운 목적을 이미 완수한 여러분이 사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렇다. 이 세상에 가장 희박한 가능성 중 하나가 있다면 바로 나란 사람이 존재할 확률이다. 허블 망원경이 처음 우주 공간에 띄워졌을때, 과학자들은 인류의 역사적 기록이 될, 허블 망원경의 첫 미션으로 무엇을 찍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수많은 행성과 빛나는 물체들 가운데 그들이 고심끝에 내린 결정은 놀랍게도 무작위의 검은 공간을 찍는 것이었다. 티끌같이 작은 어둠의 한 점을 잡아 집중적으로 망원경을 통해 빛을 흡수한 지 며칠이 지났을까. 그들은 더 놀라운 발견을 하게된다. 그 무작위의 작은 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은하계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광대한 검은 공간은 무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영원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시공간에 생명이란 것이 태동하게 되고, 또다시 영겁의 시간이 흘러 나란 존재가 태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하다못해 짧디 짧은 인류의 역사만 보더라도 조상 중 한 명만 병에 걸려서, 다쳐서, 싸워서, 굶어 죽어서, 혹은 그냥 너무 못생겨서, 그 밖에 수많은 이유로 자손을 번식하지 못했다면, 나란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자주 회자되는 수억계의 정자 간 경쟁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이마져도 과소 평가되어있다. 한 번의 사정 당 수억 대 일인진데, 한 사람이 태어나 얼마나 많은 사정을 하는가. 아! 허망하게 사라져간 수천억의 나의 형제 자매들이여.) 이 말도 안되는 확률에 비하면 나란 인간이 태어나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우주의 먼지만도 못할 것이 너무나 자명하다. 내가 애쓰고 노력한 일들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은 아닐까.
이 영원한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노라면, 난 가끔 더 극단적인 생각마저 하게된다. 과연 생명이란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희박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귀하다는 것과 동의어라 될 순 없다.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일 지언정 우린 모두 어차피 사라지고 잊혀질 존재들이다. 태양도 수명이 있다던데, 언젠간 인류도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주의 한 작은 검은 점에서조차 보이지 않게, 빠르고 조용하게, 있었는 지도 없었는 지도 모르게.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배웠지만, 그 하찮음에 난 가끔 존재의 가치를 회의한다.
삶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찾는다한들 그것이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오직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뿐 이라고 말하던, 내가 좋아하던 신해철은 허망하게 수술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충분히 행복했을까. 아니면 부족했다고 느꼈을까.
이렇게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죽음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혼란스러워 질 것이다. 가끔은 확신에 차 있다가도, 어느새 다시 회의할 것이고, 찰나의 행복은 금새 불행으로 바뀌어 잊혀져 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난,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이 생을 마감할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아무 것도 모르기에 아무 것도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고귀하지도 하찮지도 않다. 그저 모를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한 점에도 우주가 담겨있듯,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삶의 한 순간에도 온 우주가 담겨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고 나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좌절스럽지만은 않다. 아무 것도 모르기에 어딘가 설레는 구석이 있다. 왜 그럴까.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by 에릭 와이너를 읽고 쓴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