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오더의 매력
어느새 백화점은 마음에 멀어졌고 아웃렛도 멀어 귀찮다.
물욕은 남아있으나 활동범위가 허락되지 않아서 인터넷 쇼핑으로 헤매던 나날들.
사실 마음에 딱 드는 어떤 브랜드를 찾기도 어렵고
직구 성공률이 높지도 않았는데
코로나를 지나며 정착한 한 가지 소비스타일이 생겼다.
프리오더
개인브랜드에 눈을 많이 돌린 요즘 SNS나 웹상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의 판매형태를 보면
'프리오더'가 많다.
어쩌면 내가 '프리오더'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프리오더는 말 그대로 오더(order)를 먼저(pre-)하는 것이다.
옷이 만들어지기 전에 샘플을 온라인상에서 본 뒤 주문을 하고 결제를 한다.
그냥 흔한 인터넷 쇼핑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 이후 과정이 좀 다르다.
프리오더는 조금 더 착한 가격에 퀄리티 좋은 옷을 살 수 있는 대신
주문을 하고 난 뒤 짧게는 2주, 길게는 4-5주, 그 이상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봄에 진행하는 프리오더 상품들은 여름옷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 언제나 패션은 앞서가는 것이다.
여름에 시어서커 소재의 하늘색 원피스를 입을지 여름 니트 소재의 얇은 카디건을 입을지 조금은 쌀쌀한 이 날씨에 결정을 해보자.
프리오더를 제공하는 사업자 입장에서는 재고를 쟁여둘 공간이 크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또 주문받은 물량에 안전물량 정도만 더해서 생산을 하면 되기 때문에 팔리지 않을 재고를 생산할 필요도 없고 그 재고를 오랫동안 떠 앉지 않을 수 있다. 이 또한 비용절감.
이 지점은 소비자에게는 아쉬운 부분이 되는데 이 옷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프리오더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즉 미리 주문하지 않으면 추후에 재생산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 수 없다. 보통 같은 물건을 재생산하게 되는 경우는 정말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야만 가능하더라. (더 팔 수 있는데 생산을 멈춘 생산자도 아쉽긴 하겠다.) 그러니까 지금 저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면 다음은 없다. 지금이다. 소비자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을 소화해 내려면 프리오더는 오더를 받는 시간을 정해야 한다.
'월요일 아침 9시부터 수요일 밤 9시까지 프리오더를 받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럼 월요일 9시에 주문을 넣은 사람이나 수요일 밤 8시 59분에 주문을 넣은 사람이나 큰 차이 없이
비슷한 날짜에 물건을 받게 된다.
하지만 수요일 밤 9시 1분에 주문을 넣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구매를 할 수 없습니다.
프리오더 기간이 넉넉한 경우, 나는 프리오더 마감시간까지 시간을 뻐겨보기도 한다.
'정말 나 여름이 오면 이 흰 카디건을 입을까?'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하게 된다.
그런 나 같은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이제는 바로 배송 물량을 투입한다. (줄여서 바배라고 합니다. )
바로배송물량 조금에 프리오더물량 대량을 넣어 오더를 오픈한다.
월요일 9시 땡 하고 주문한 사람은 뜻밖의 바로배송물량으로 당장 내일모레 물건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 이왕이면 같은 돈인데 먼저 받으면 좋잖아? 하면서 월요일 9시에 구매버튼을 매섭게 클릭하는 나 같은 소비자가 모여서 서버를 다운시키게 되는 것이다. 서버가 다운되면 생각하게 된다. '뭐야. 이거 인기 대박?'
프리오더는 어쩐지 여유로울 것 같지만 경쟁에 나를 밀어 넣는다.
경쟁은 A와 B만으로는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A와 B를 경쟁하게 하는 C가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했다.
바로배송이 나와 다른 사람을 경쟁하게 만든다. 이런 C.
프리오더는 주문을 했는데 당장은 집에 도착하는 것이 없으니
무엇을 주문했는지 잊고 또 구매를 이어간다.
클릭 몇 번으로 분명 물건을 샀는데 사도 사도 오지 않는 신기루 같은 프리오더.
그러다 산타할아버지 선물처럼 어느 날 택배가 집 앞에 도착한다.
"이게 뭐지?"
(부스럭부스럭)"아! 나 이거 샀지!"
나에겐 아끼는 비장의 프리오더 브랜드가 하나 있는데
이 프리오더는 물량으로 절대 공세를 하지 않는다.
자기가 확보한 원단만큼만 생산하는 프리오더를 진행한다.
먼저 원단을 보여준다. 차르르한 비단을 보는 조선의 여인네 마음처럼
나도 그 원단을 보며 예쁜 옷을 그려본다. 심지어 이 원단은 명품브랜드 000에도 들어가는 원단인데
그것을 직접 떼어와서 만들기 때문에 가격이 명품브랜드의 반에 반에 반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귀가 팔랑 인다.
한 달에 두세 번, 각각 다른 디자인의 프리오더가 각각 다른 날에 열린다.
여기는 정말 1분 내로 결제를 마쳐야만 물건을 겟 할 수 있다.
가격도 결코 만만치 않다. 백화점에 비하면 괜찮지만 다른 인터넷 쇼핑몰에 비하면 정말 고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은 자가 구매할 수 있는 그런 프리오더이다.
바배 포함의 프리오더는 오더의 양을 꽤나 많이 열어둔 것이라 재고물량 처리의 어려움이 없는 것이 이득이라면 오더의 양이 한정적인 프리오더는 판매자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다음 프리오더에는 같은 디자인을 살 수 없다는 희소성. 그것이다.
장인의 손길을 받은 물건이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입은 그 옷을 따라 사려고 해도 기간이 지나면 절대로 따라 살 수 없다는 것. 결국 난 마케팅의 노예가 된 것인가.
어떤 방식이던 판매자에 대한 신뢰가 참 중요한 것이 프리오더인 것 같다.
무엇보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이 물건이 아주 잘 만들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중요하고
더불어 판매자 그 자체가 설득력을 가질 때 프리오더가 믿음이 간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설득의 3대 요소 중에는 에토스가 있다. 에토스는 화자의 인격과 인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품이 좋은 화자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힘을 실어준다.
프리오더의 화자는 에토스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판매자의 인격이나 인품이 갖춰져야 오랜 기다림을 감내하고 소비를 일으킬 수 있다. 그 인격이나 인품이 정치인에게 기대되는 그런 수준은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귀감이 되는 모습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외모일 수도 있고, 아주 성실한 매일의 삶을 사는 사람일 수도 있고,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귀를 활짝 연 모습일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구보다 빨리 좋은 트렌드를 내 옷장에 끌어다 줄 수 있는 리더일 수도 있다.
판매자의 일상이나 사소한 초이스가 내가 지켜보는 내내 내 취향과 잘 맞았을 경우,
판매하는 물건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바라보게 된다.(이런 부분은 인플루언서처럼 일상이 잘 공유돼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판매자가 자신의 일상을 많이 공유하는 것이 곧 자기 브랜드 광고가 되곤 하고요. 이래서 4차 산업혁명 시대는 seller의 시대인 것 같긴 하네요. 무엇이든 팔아야 하는. 글도 팔고 있습니다.)
물건 하나를 샀다는 생각보다는 내 일상 맥락에 맞는 부품을 하나 더 추가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예를 들어, 내가 추구하는 웰빙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환경도 생각하고 내 몸도 생각하는 좋은 바디워시를 샀다는 확신을 주는 '좋은 소비였다'라는 기분.
프리오더에 젖어들면서 물건을 살 때 히스토리를 아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되었다. 재활용 소재로만 만드는 가방이나 핸드폰 케이스, 인체에 무해한 세제, 혹은 made in Korea라던가 제품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판매자의 목소리는 무엇인지도 들춰보게 되었다. 소비의 즐거움이 사는 순간뿐 아니라 사러 가는 길에서도 생기는 새로운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