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놀이학교를 보낸 인연으로 아직도 종종 만나고 연락하는 우리는
나이도 직업도 고향도 모두 다르다.
첫눈에 사람을 알아본 적이 없는 나도 이 엄마들만은 첫눈에 알아봤다.
좋은 사람들. 상식적인 사람들.
거기에 하나 더,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사람들.
하지만 이것이 또한 우리의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를 잘 견디지 못한다.
사과할 줄 모르는 아이와 사과할 줄 모르는 아이로 키운 부모에 대한 불만.
미안하다고 말하면 지는 게 되는 사회로 변했다.
옛날엔 지는 게 이기는 거고 양보하는 게 이기는 거라고 했는데
나도 오늘 이 시점에 그 정도까지 내 아이를 내몰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걸음씩은 뒤로 물러나 덜 미안해도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아야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고 잘 못할 수 있는 어린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할 수 없는 어린이는 아니다.
모르고 했지만 미안해. 알고 했으면 진짜 잘못한 거니까 많이 미안해.
우리는 그 지점이 비슷한 사람들이라 6년째 만나고 있다.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보며 '엄마가 기다릴게.' 하는 상황은 사실 나로선 견디기 힘들다.
내 집 안에서라면 모를까 여러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불편해하는 것 같다면
엄마가 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
그만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엄마 아빠마저 계속 저러는 내 아이의 과잉행동을 통제하지 않으면
저 아이는 누구의 통제를 받을 수 있을까?
아이는 통제받아서는 안 되는 순수한 영혼일까?
나는 여전히 칭찬에 인색한 엄마로 살고 있다.
아들을 키우며 칭찬에 인색한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된 것 같다.
'잘한다 잘한다' 하고 '최고다 최고다' 해야 아이의 자존감도 높아지고 자신감도 생긴다고 들 한다.
하지만 나는 못하는 거 잘한다고 못하겠고 덮어두고 최고라고도 하기 힘들다.
그렇게 근거 없이 거만해지는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고 이미 다 후진 덕목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겸손, 그게 난 좀 있었으면 한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도, 아이를 키우면서도 나는 모든 아이를 좋아하는 어른은 아니다.
충분히 사랑스러운 아이도 있지만
딱 보기 싫은 아이들도 있다.
우리 엄마는 어디 가서 아이 싫어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 나빠 보인다고.
좋은 어른은 세상의 모든 아이를 이해하는 척해야 하는 거냐고 따져 묻는 게 나다.
아이를 돌보는 일,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모든 분들을 정말 존경한다.
그건 정말 인간의 인내와 한계에 도전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자주 봐야 하는데 볼 때마다 어른인 내가 킹 받게 하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내 아이처럼 가르칠 수도 없고
그 부모에게 이렇게 아이를 키우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어
만나고 집에 오기만 하면 속이 불편했다.
한 아이의 자유도가 너무 높을 때,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아이는 피해를 보기 십상인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오늘 그 화풀이를 괜히 내 브런치에 남겨본다.
나는 버르장머리가 없는 아이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