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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현 Apr 14. 2023

익명의 글


처음부터 개인주의를 선호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집단의 중심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집단의 중심이 되지 못하자

집단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주일날은 언제나 아침부터 분주했다.

아빠는 주일학교 교사로, 엄마는 성가대 준비로 일찍 가셨다.

나랑 동생은 교회 셔틀버스를 시간에 맞춰 타고 갔다.


버스를 운전하시는 집사님부터 우리를 알아보셨고

버스 초입부터 자리에 앉기까지

양쪽에 인사를 해야 할 곳이 참 많았다.

권사님, 집사님이라는 호칭이 다 부모의 친구를 뜻하는 건 줄 알았다.


교회 문턱은 계단 두 개를 올라가야 했는데 거기서부터 또다시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야 우리는 각자의 부서로 갔다.

복잡한 교회 로비, 환하게 웃음을 보이며 인사하는 수십 명의 모습이 복잡한 건지 소란한 건지 상식적인 건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 네가 얼마나 성경말씀을 줄줄 외웠다고~ 의인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내 기억엔 없는 성경암송대회에서의 나를 성대모사하시는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는 버거웠다. 사춘기가 왔던 즈음이었나 보다.


여드름도 나고 성격도 모나 지면서 암흑 같은 중고등부 시절, 여전히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예쁜 친구들이 보였고 부러웠지만 감히 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 예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대학에 갔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으로 교회를 옮겼다.



대학생이 천 명도 넘게 모이는 교회에서 나는 철저히 somebody였다.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오히려 나는 나 자신을 찾아갔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건지 교회를 끌려 다닌 건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할 수 있었다. 


결국 거기서도 한 명씩 얼굴을 익히며 소모임을 하게 되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거 반, 나를 아는 거 반으로 100이 되었지 

상대방 90에 나 10의 비율로 관계를 맺을 일은 없었다.  

그것만으로 난 충분히 편안했다.


익명으로 사는 것, 대형 프랜차이즈 음식점에 가는 것, 누구나 아는 브랜드에서 물건을 사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줬다.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 있는 게 좋았다. 어려서부터 늘 부끄러움이 많았는데 극복한 줄 알았지만 어림없었다.


몇 년이나 살았던 동네를 떠날 때의 해방감, 하던 일을 그만둘 때의 개운함, 관계가 틀어져 내 손을 아예 떠나버렸을 때의 홀가분함, 아이를 유치원 셔틀에 태운 뒤돌아서는 가벼운 발걸음, 반가운 만남 끝에 집에 돌아가는 차에서 운전대를 잡고 출발할 때의 자유로움이 모두 같은 재질인 것 같았다. 


여행을 마치고 나서 보다 여행을 가기 전 공항에서의 순간이 더 선명한 여행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선명함은 빛났지만 알 수 없는 중압감을 동반했고 

희미함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내려놓아도 될 만한 믿음이 가는 순간이었다. 


잠시만이라도 희미해질 수 있는 순간이 내게는 다른 말로 '쉼'이었다. 


이사 온 동네가 익숙해져 간다. 다정한 맛이 있다. 하지만 익숙함은 익명성을 갉아먹을 텐데 곧 피로해질지도 모르겠다. 선명함과 희미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다 지칠 때쯤 조그만 소란을 피우고 해방을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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