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기적
고양이의 이름은 ‘라임’으로 정했다. 연한 주황빛의 털이 새하얀 털과 어우러져 무늬를 이루고 있는 외모를 보자마자 오렌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오렌지나 레몬으로 짓고 싶진 않아서 ‘라임’은 어떨지 고민하던 찰나, 함께 이름을 고민하던 친구가 갑자기 ‘라임’이라는 이름을 권했다. 친구에게 내가 그 이름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그가 라임이라는 이름을 외친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난 그 친구가 키우고 있던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줬더랬다. ‘제제’라고.
그걸 생각하니 더더욱 우리 고양이를 ‘라임’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제제의 친구, 라임 오렌지 나무.
하필 드라마 <시크릿가든>이 방영되고 있던 때라 모든 사람이 ‘길라임’의 라임이냐고 묻곤 했지만, 길라임의 라임이어도 상관없었다. 그 강한 여성이 우리 고양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길라임의 라임이가 되기도 하고,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오렌지 나무가 되기도 했던 라임이는 길라임처럼 당차게, 라임 오렌지 나무처럼 쑥쑥 잘 자라서 10년째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이름이 없었던 노란 아기 고양이는 라임이라고 부르면 달려 나오는 사랑스러운 나의 고양이가 되었다. 나는 ‘밍기뉴’라는 라임 오렌지 나무를 유일한 친구처럼 여기고 그에 의지하며 자랐던 제제처럼, 라임이가 나에게 주는 사랑과 평안에 기대 20대를 보냈다.
라임이는 나의 많은 처음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안아본 고양이, 처음으로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함께 살게 된 가족, 혈연관계가 아님에도 가족이 된 첫 존재. 처음으로 나를 사랑해준 고양이. 처음으로 나와 사랑을 나눈 동물. 라임이와의 모든 처음, 라임이가 나에게 준 모든 첫 순간이 벅차고 행복했지만 내가 라임이와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벅찬 기억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내가 죽기 전 펼쳐질 주마등 기억의 일부가 되겠지.
언제쯤이었을까. 갑자기 라임이와의 지난 시간을 회상해보다가 깨달았다. 말도 통하지 않고, 내 말을 알아들으려는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고양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기 고양이였던 라임이는 지금보다 아는 것이 적어서 겁도 적었지만 사람의 손길만은 겁을 냈다. 눈곱을 떼어주려고 눈 근처에 손을 가까이 대면 잽싸게 얼굴을 뒤로 빼며 손을 피하기 바빴고, 양치를 하려고 입을 벌리면 내 손에 피를 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라임이는 내가 눈 근처에 손을 대면 그게 자신의 눈곱을 떼어주는 일인지 알고 눈을 감은 채 기다리고, 양치를 하기 위해 치약 묻은 손을 입 속에 넣는 것도 참아준다. 귓속을 만지고 소독약으로 닦아줘도, 배를 만져도, 갑자기 큰 손으로 뒤통수를 쓰다듬어도 이젠 놀라지 않고 그것이 내 손길임을 기억하고 안심하며 받아준다. 내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여전히 발톱을 깎을 때마다 전쟁을 치러야 하고, 가끔 목욕을 시킬 때면 옆집에서 동물 학대로 신고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울어 젖히며 반항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배 위에 올라와 잠을 청하고, 엉덩이를 쳐달라며 엉덩이를 들이민다. 나와 함께 침대에서 잘 때는 엉덩이를 내 얼굴 쪽으로 두고 잔다. 자신의 뒤는 안전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동물병원에 가면 언제나 가장 시끄럽고 예민한 고양이인 라임이가, 낯선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손길도 허락하지 않는 겁 많고 까칠한 라임이가 자신의 안전을 온전히 나에게 맡긴 채 새근새근 잠을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적을 믿게 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신체 구조와 비슷한 본능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도 온전히 믿고 사랑하기 힘든 세상 속에서, 이 작은 동물이 자신보다 10배는 큰 인간이라는 동물을 믿고 함께 살아주고 있다는 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일까 싶은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란다. 내게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 믿게 해 주는 존재가 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우리 라임이다.
행복이 참 복잡하고 먼 것처럼 느껴질 때, 라임이가 내 다리 위에 누워 배를 들썩이며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면 행복이 바로 내 위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사실 몸에서 나는 갈증이 아닌 마음에서 나는 갈증을 다스리기 위해 물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불을 껐던 밤, 이제 내가 누워서 잠을 청할 거란 걸 아는지 침대 끄트머리로 내려가 내가 누울 자리를 마련해주는 라임이를 보며 타들어가던 마음이 몽글몽글한 사랑에 젖어드는 걸 느꼈다. 그런 라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라임이의 분홍색 코를 내 이마에 맞대고 비빌 때마다 그 코가 여전히 촉촉하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 고양이는 골골송을 부르며 내 행복을 연주한다.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라임이가 우리 집에 와서 처음으로 골골송을 불렀던 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며 놀라 인터넷에 ‘고양이 이상한 소리’ ‘고양이 그르릉 소리’ ‘고양이 코 고는 소리’ 등을 검색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불안에 떨게 했던 그 소리가 이제 언제든 나를 가장 편안한 곳으로 데려다주는 마법 같은 노래가 되었다는 걸 생각하며 또 기적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에서 나를 반겨줄 존재가 필요해 동물을 입양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나는, 이젠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욕심이었는지를 안다. 이젠 어두운 집에서 혼자 자다가 뛰쳐나와 매옹매옹 울며 나를 반기는 라임이를 그때까지 혼자 둔 것이 미안한 마음이 저 고양이가 나를 반겨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 크다. 그래서 새벽 5시마다 밥을 달라고 깨우는 라임이의 울음소리에 기꺼이 일어나 밥을 주고 천천히 먹으라며 등을 쓸어주는 것을 내 습관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내가 라임이에게 가질 수밖에 없는 미안한 마음을 갚기 위해 나의 생활 습관을 바꾸고, 게으른 나를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이것 또한 기적이라면 기적일까. 삶을 바꾸고 구원하는 존재를 만나 사랑하는 것 또한 기적이라면 말이다.
-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