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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Nov 30. 2021

[OB's뮤지컬] 하데스타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노래

(스포일러 有)

가끔 음악에 대해 생각한다.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형체도 질감도 없는 그것이 그저 '소리'라는 진동에 실려 선율을 지닌 채 우리의 귀에 닿으면 그것은 삶이 되고 구원이 된다. 음악은 언제나 누군가의 꿈이었고, 누군가를 살렸고, 누군가에겐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오르페우스는 오랫동안 봄이 오지 않는 세상에 봄을 불러오기 위한 노래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가 세상을 밝힐 노래를 쓰던 동안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었던 에우리디케는 굶주리다가 결국 하데스의 손을 잡고 만다. 그때만 해도 예술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오랜 말들만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오르페우스가 쓴 노래는 오랫동안 남아 세상을 지탱하겠지만, 그 노래가 불러올 봄이 절실했던 에우리디케를 비추진 못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노래를 열쇠 삼아 머나먼 길을 건너와 에우리디케를 찾아냈다. 그리고 에우리디케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하데스 앞에서 노래했다. 봄을 불러오기 위해 만든 그 노래를. 오르페우스가 만든 노래, 그 '노래'라 불리는 그저 선율을 담은 소리 뿐인 그것이 지하 세계를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처음엔 한 겹이었던 그 노래에 점차 다양한 목소리가 더해졌다.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났다. 음악 따위 비웃을 것만 같았던 하데스조차 그 멜로디에 녹았다. 인간은 왜 그런 것에 감동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걸까.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마음을 연 하데스가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데려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 손을 잡지도, 나란히 걷지도 못한 채 에우리디케를 앞서 걸으며 이 곳을 빠져나갈 것.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아무리 궁금해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 뒤를 돌아보는 순간 에우리디케는 영원히 지하세계에 갇히게 된다.


불행히도 신화의 결말은 바뀌지 않았다. 오르페우스는 입구 앞까지 잘 와 놓고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고, 그렇게 에우리디케와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관객 모두가 비탄에 빠져 있을 때 이 극의 해설자인 헤르메스가 나타나 말한다. 오랜 노래. 오랜 노래를 다시 부르는 오르페우스. 결말을 알면서도 또다시 부르며 오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오르페우스를.


그 순간 냉소와 풍자로 가득 차 있었던 하데스타운의 기온이 급격히 높아졌다. 사랑이었다. 자신에게 닥칠 고통과 번뇌를 모두 알면서도, 이번에도 자신은 그 번뇌를 쉬이 이겨내지 못해 또 다시 지상을 한 발자국 앞둔 그곳에서 모든 걸 잃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다시 시작하는 것. 그 모든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다시 시작하는 것. 오르페우스가 불렀던 오랜 노래는,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부른 노래이기도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 극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만들어진 건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쓰인 신화와, 21세기에 다시 만들어진 이 이야기의 다른 점은 오르페우스가 죽지 않고 에우리디케를 되찾아오기 위해 끊임없이 노래한다는 것이다. 


또 다시 성냥을 찾으며 나타난 에우리디케의 머리엔 오르페우스가 노래로 피워냈던 빨간 카네이션이 꽂혀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슬픔이 반복되어도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희망이었다. 어쩌면 처음엔 오르페우스의 노래로도 지하 세계의 문을 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데스의 마음을 녹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르페우스는 아주 조금씩, 축적된 희망을 보며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이뤄냈을 것이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지면 다음 생엔 에우리디케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만나자마자 청혼을 하는 것도, 에우리디케가 자신을 찾는 것도 듣지 못한 채 작곡에 몰두하는 것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에우리디케를 자신의 곁에 두고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오르페우스가 거듭되는 생 내내 그 오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의 모든 발걸음이 사랑으로 보인다.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하데스의 마음을 녹이고 하데스의 마음을 돌렸을 때, 왜 나는 인간이 그토록 음악에 감동하고 음악에 죽고 못 사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이제는 그 답을 알겠다. 오르페우스가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르페우스가 사랑을 노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페르세포네가 함께 불렀던 그 선율을 담은 사랑 노래를. 음악과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사랑 없이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사랑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말이 아닌 다른 형태로도 사랑을 기록하고 전하고 싶어서 만들어낸 사랑의 다른 언어가 아닌가 싶다. 


신화 속의 오르페우스가 다시 리라를 들고 지하 세계로 내려갔을 땐 더 이상 그의 노래가 통하지 않았다. 스틱스 강을 두 번 다시는 건널 수 없었다. 지상으로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결국 죽어버렸지만 주인을 잃고도 노래하던 오르페우스의 악기는 별(거문고자리)이 되었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죽은 후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고 별이 되어 밤을 영원히 밝히는 오르페우스를 기억하기 위한 헌정시이자, 그 별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의 노래다. 


오르페우스가 피워낸 붉은 카네이션은 ‘사랑’을 상징하는 동시에 ‘노동 운동’ ‘사회 운동’의 상징물로 쓰이기도 한다. 하데스타운의 지하 세계에서 자신을 잊어가며 노동에 몰두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오르페우스의 노래와 행보에 희망을 걸었다. 이 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주의 매커니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하데스와 그의 세계를 풍자한다. 돈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세계에서조차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하는 것은 사랑이며, 우리를 살게 하는 것도 사랑이다. 우리도 모르는 새에 우리를 살리고 있는 사랑의 힘으로, 다음엔 더 나을 것이라 믿게 만드는 희망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하데스타운은 사랑을 잊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위에서 여전히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오르페우스를 기억하게 하고, 단 하루도 그의 노래가 울려퍼지지 않은 적이 없는 이 세상을 인식하게 한다. 늘 사랑이 있었다. 그러니 늘 사랑이 존재하도록, 사랑하며 살라는 것. 약 3000년 동안 세상에 존재했던 ‘epic’이 노래로 다시 쓰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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