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예전에는 예능 덕질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지독한 얼빠였으며, 한 연예인에게 빠지면 다른 연예인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외골수 성향의 덕후였기에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그룹의 멤버가 출연한 프로그램이나 그와 티끌 만큼의 관련이라도 있는 연예인에게만 내 관심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무한도전, 런닝맨 등 덕후를 끌어 모았던 예능 프로그램이 왜 그렇게 큰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 예능 프로그램은 그저 주말에 약속이 없으면 저녁에 가족들과 밥을 먹으며 잠깐 시청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게스트로 출연하는 날에만 챙겨보면 되는 소비성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그러다 2020년 연말 쯤부터 1박2일을 보게 됐다. 남들은 스타트업의 한지평으로 김선호를 앓느라 바쁠 때, 나는 드라마보다 1박2일을 더 열심히 챙겨보기 시작했다. 내게 2020년은 코로나와 외로움 그리고 불안으로 점철된 한 해였다. 간간이 행복했지만 행복했던 일보다 그렇지 않았던 일들이 더 먼저 떠오르는, 참으로 드물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버리길 바랐던 2020년 겨울의 끝자락에서 1박2일을 만났던 것이다.
1박2일 시즌4를 1화부터 다시 챙겨보며 쓸모 없는 후회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더 빨리 김선호를 알았더라면, 그래서 1박2일 시즌4를 첫방부터 챙겨봤더라면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크게 웃었을 텐데. 오랫동안 활동을 했던 그였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19년부터라도 그를 좋아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무엇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슬픔이 잔재처럼 남아 있었던 그 해의 내게 그렇게 무해하고 편안한 웃음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의미 없는 가정을 몇 번이고 해 보며 아쉬워했을 만큼 1박2일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내가 좋아하게 된 김선호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을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것만 좋아했다면 1박2일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처럼 복잡하진 않을 것이다.
존폐의 위기를 맞고 시끄러웠던 프로그램이 갑자기 여자 PD를 앞세워 변화를 꾀하겠답시고 새로운 멤버를 꾸려 나타났을 때도 나는 시큰둥했다. 유리 절벽이라 생각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뭐, 지금도 그게 유리절벽이 아니었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야생이라는 컨셉을 내세워 남성성 가득한 이야기를 그리던 예능이 아닌가. 그러다 언젠가 1박2일 시즌4를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안고 제대로 시청하게 되었던 날, 걱정이 무색하게 깔깔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1박2일은 다양한 면에서 기대 이상이었다. 비겁하고 가학적이라 생각했던 기획들 대신 참신하고 유쾌해서 벤치마킹하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기획들과 계산 없이 마음껏 바보가 되어가며 순수한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채우고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무해해서.
그렇게 매주 1박2일을 챙겨보다 보니 김선호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에게도 정이 들기 시작했다. 방글이PD가 이화여대 출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그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더욱 깊어졌다. 나는 정은커녕 호감도 없었던 6명의 남자 연예인들이 서로 정을 나누며 친해지고, 서로의 바보 같은 모습을 스스럼 없이 보여주며 유치하게 싸우고 화해하는 모습을 참 행복하게 지켜봤다. 나중엔 1박2일 때문에 이런 결론까지 내리게 됐다. 나의 가장 유치한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바보 같은 웃음을 주고 받은 사이 만큼 돈독한 사이가 없을 것 같다고. 그래서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좀 더 솔직하게, 바보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연령대도 직업도 성격도 다른 그들이 격 없이 정을 쌓아가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정말 많이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일요일 저녁엔 웬만하면 약속을 잘 잡지 않았다. 저녁 6시 30분 전에는 중요한 일들을 모두 마치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친구와 카톡을 하며 원 없이 웃었다. 덕분에 천하의 월요병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 시절엔 나를 그렇게 웃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참 귀했다. 귀한 만큼 소중하고 고마웠다.
그러다 갑자기 그 프로그램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내 덕질은 왜 결국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까. (내 덕질 인생엔 마가 끼어 있나T_T 왜 이런 커다란 시련이 생기고야 마는 걸까… 머리를 싸매며 운명을 원망했던 시절…….) 그렇게 아무런 간절함이나 애틋함 없이 그저 편하게 좋아할 수 있어서 좋았던 덕질마저 나를 다시 텔레비전과 멀어지게 만들 줄이야. 일요일 저녁엔 무조건 TV 앞에 앉아있던 내가, 의식적으로 일요일 저녁에 외출을 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두 달은 도망을 다녔던 것 같다. 프로그램이 싫어졌다거나, 다른 악감정이 생겼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멤버가 빠진 1박2일을 보거나 듣는 것이 내가 감당하기 힘든 크기의 슬픔일 뿐이었다.
그래도 시간 만큼 용한 약은 없다고, 거실에서 들려오는 1박2일 멤버들이나 방PD의 목소리를 들어도 괜찮은 날들이 늘어갔다. 가끔 가족들과 함께 앉아 방송을 시청하기도 했다. 시청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역시 더 힘들고 속상했지만, 그래도 웃음이 슬픔을 이기는 순간도 점차 많아졌다. 결국 여전히 엉뚱하고 원초적인 ㅎㅎ 모습을 드러내며 기분 좋은 웃음을 주는 그들을 보며 웃게 되더라. 여전히 정겹고 귀여운 그들을 보면서 위안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다 최근 방글이 PD와 라비가 하차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왠지 방송을 챙겨보고 싶은 마음에 정말 오랜만에 시간 맞춰 본방송을 시청했다. 방글이PD가 보낸 커피차에 눈물 짓다가 또 김종민의 해맑은 한 마디에 모두 웃고, 라비가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쓴 편지를 울면서 읽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며 계속 울었다. 라비의 편지와 노래에 담긴 마음이 내가 1박2일을 사랑하는 마음과 너무 닮아 있어서 애틋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내가 쓴 편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라비의 편지에 공감하며 계속 엄마 몰래 눈물을 닦았다.
문세윤의 대상 수상 소감을 들으며 그 장면이 최근 몇 년 간 내가 본 가장 슬픈 장면인 것처럼 많이 울었었는데, 또 이렇게 1박2일 때문에 울게 되다니 나도 참 나다 싶었다. 그래도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가 아니면 내 감정 때문에 우는 일은 거의 없는 내가 그렇게 여러 차례 다양한 감정에 휩싸여 울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다. 흐느낄 정도로 크게 울면서 편지를 읽는 라비와 함께 눈물 짓는 멤버들, 라비가 만든 노래 가사 그리고 그 노래와 함께 지나가던 추억들을 소중히 곱씹고 나니 나도 이제야 비로소 1박2일과 안녕을 하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보지 말자'는 의미의 안녕이 아니라, 너무 갑작스레 찾아와 그 어떤 것도 정리하지 못한 떠나보내야 했던 소중한 추억에 대한 안녕이다. 떠나보낼 마음도, 의도도, 준비도 갖추지 않은 채 억지로 떼어 놓아야 해서 미련과 슬픔만 가득 안은 채 보내주지 못했던 과거와의 안녕이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건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임계점을 지나버린 행복의 바짓가랑이는 그만 붙잡고 마음의 방에 잘 담아둬야지. 늘 머리보다 느리게 나아가는 마음의 속도로, 너무 늦어버렸지만 지금보다 더 빠르게는 전할 수 없었던 인사를 전한다. 이젠 그 로고송을 들어도 슬퍼하며 도망치지 않고 다시 예전처럼 밥을 먹으며 보기도 하고, 그러다 편하게 웃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안녕, 1박 2일. 웃음이 가장 필요했던 때 내게 찾아와 매주 일요일마다 의심 없는 행복을 줬던 고마운 사람들도 안녕. 낯설고 다른 이들이 만나 친구와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배웠다. 기어코 내 추억이 되어버린 그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한 채 마음껏 그리워하며 살아가야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고 유치한 바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유난히 철이 없어지고
더 어리석어져도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 손을 잡고 걷네 우린
MY RED AND BLUE
MY ORANGE AND
MY YELLOW GREEN AND MY PURPLE
OH 보고 싶을 거야 나의 사랑아
GUESS WHO WE ARE?
너라면 난 밖에서 자도 좋아
WHO WE ARE?
너라면 난 며칠을 굶어도 좋아
넌 날 다 내어주게 해
좋아 넌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해
안녕 누군가를 이토록
그리워한 적 없어
난 널 빈틈 없이 온 힘 다해
그리워할래 내 사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