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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Aug 29. 2022

[OB'sPlay] 어느 부드러운 여름날의 환희

터칭 더 보이드


뜨겁지만 아름다운 2022년 여름, 대학로의 아트원씨어터에서는 매일 조와 사이먼이 시울라 그란데의 서쪽 벽을 오르고 있다. 실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강인한 생명의 힘을 전하고 있는 이 극과 여름을 함께 하며, 등반, 설산, 빙벽과는 거리가 먼 도심의 사무실 속 개미로 살아가는 나도 말로 형용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아주 커다란 에너지를 얻고 있다. 그것은 마치 생의 의지 같기도 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긍정이기도 하고, 누가 보내는지 알 수 없지만 뜨겁게 와 닿는 응원 같기도 하다. 


인생에 어떤 작품이 찾아오는 데에는 다 순서가 있는 것인지, 운이 좋게도 인간이 얼마나 동물적인지, 'void'가 뭔지 알게 된 후에 이 작품을 만났다. 


인간은 100% 동물이라고 한다. 동물이 그렇듯, 인간의 삶의 목적은 생존이다. 흔히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믿지만 행복은 생존을 위한 행위를 돕는 자극과 같은 것일 뿐,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선택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그것이 너무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라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서은국, 『행복의 기원』) 


조 심슨은 하산 중 오른쪽 다리 골절이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다. 그와 함께 시울라 그란데를 올랐던 등반 동료 사이먼은 등반은커녕 한 걸음 걷기도 힘들어진 조를 포기하지 않고 안전히 아래로 내려다 보내겠다 결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조와 사이먼이 모두 사력을 다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사이먼은 조와 자신을 연결하고 있던 로프를 끊었고, 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 속으로 추락했다. 


모두가 조가 죽었을 거라 판단했지만 조는 그 다친 다리를 이끌고 크레바스를 탈출하고, 눈비탈길을 오르고, 빙퇴석 지대를 기고 또 기어 베이스캠프로 살아 돌아왔다. 극중에선 이 과정에서 거의 정신을 잃은 조가 꿈속에서 자신의 경야(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 전에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관 옆에서 밤을 새워 지키는 일)에 참석한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생명의 끈을 놓으려 하는 조에게 누나 새라가 말한다. 



"리처드, 산에 왜 가지? 너 아는 대답해."

"...산이 거기 있으니까요."

"조. 살아야 해. 살아가야 해."

"...왜. 왜 살아가야 해.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이렇게 괴롭고 아프고 힘들고.. 외로운데."

"생명이 거기 있으니까. 생명이 있으면 살아가야 해. 최선을 다해 살아 있어야 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니까. 



나라면 벌써 포기했을 거라 말하는 리처드에게 새라는 불같이 화를 낸다. 네 인생이 아니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라고. 너도 동물이고, 생명의 빛이 꺼져가면 죽음과 싸우게 될 거라고. 


새라의 목소리는 실제 조가 사경을 헤맬 때 어디선가 끊임 없이 들렸다던 자신을 다그치는 목소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목소리가 극 중에선 누나의 목소리로 설정되어 있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 어딘가가 피워냈던 그 상상속 경야에서의 외침들이 이 극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는 눈치 채지 못하지만 100% 동물인 채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진리와도 같다.


깊은 크레바스 안에 홀로 처박혀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울던 조는 말한다. '나 정말..죽고 싶지가 않아.' 그 결연한 외침에서 출발한 조의 여정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휘청거리며 사는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조의 말대로 고통스럽고 괴롭고 아프고 힘들고 외로워도 아직 생명의 빛이 꺼지지 않았다면 살아가야 한다. 살아 남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냐느니, 이렇게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느니의 말 따위는 사치였다. 완전히 아작이 난 다리에 부목을 대고 얼음 도끼를 목발 삼아 빙퇴석 지대를 지나가려고 낑낑대고 있는 조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동안 우리는 삶과 죽음 앞에서 얼마나 오만했는가. 


조의 사투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건 그동안 누군가 혹은 나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며 살 '가치'를 매겼던 기억들이 후회가 되어 흐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으스러진 몸을 다시 고쳐서 예전처럼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도, 그래서 그 좋아하는 산에 다시 오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어도, 아직 살아 있다면 살아 남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의무이자 목적. 살아 남고자 하는 인간의 발버둥이 처절하고 아프더라도 숭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터칭 더 보이드의 배우들은 거의 매일을 아트원씨어터에 펼쳐진 시울라 그란데 위에서 땀과 눈물을 쏟으며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실제로 배우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몸을 불살라 죽음 직전의 순간까지 관객을 인도하는 배우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생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실제 조와 사이먼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얼굴이 동상으로 부르터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채 하산했지만, 배우들은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무대에 등장해야 하기 때문에 특수 분장으로 동상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 대신 동상과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땀과, 땀이 범벅이 되어 빛나는 얼굴로 조와 사이먼의 여정을 재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게 된다.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무대를 산이라 여기며 등반하는 그들의 여정이, 지금 다리를 부여잡고 절규하는 조의 부상이 모두 진짜라고. 특수 분장이 가능했다면 동상을 더 진짜처럼 실감 나게 표현해 줄 순 있었겠지만, 특수 효과 없이 관객이 안데스의 설산, 부상과 죽음을 목도하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배우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우리가 지금 얼마나 뜨겁게 살아 있는지를 알게 하는 생의 증거가 되어 극이 끝난 후에도 내 삶에 흐르는 에너지로 남는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뜨겁게 분출한 비명, 신음, 절규와 그를 보며 그가 살아남기를 바라며 응원하는 관객들의 마음이 닿아 만들어낸 아우라가 매일 아트원씨어터를 채우고 있다. 요즘의 나를 살게 하는 것은 그 아우라다. 그래서 나는 극장에 간다.



그렇게 힘겹게 살아 남은 조는 2년 동안 여러 번의 수술을 거친 후 또다시 산에 올랐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조가 애초에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산에서 다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살아남도록 강하게 다그치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도,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초인적 의지와 힘이 솟아났던 것도 그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공간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행복은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드는 자극과도 같은 것이니까. 조에게 행복은 산이었고, 그것은 곧 산이 조를 살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가 다름 아닌 산에서 다쳐서 산속에서 죽어갔기 때문에 조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 거라고, 그 어느 공간보다 산이 그에게 생존을 향한 투지를 불태우게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조는 다시 산에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 그의 삶이 있기 때문에.


내게도 극장은 그런 곳이다. 그곳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 내가 내뱉은 웃음과 흘린 눈물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생의 이유가 된다. 내 행복은 그런 형태로 존재한다. 


요즘은 터칭 더 보이드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혜화의 골목, 초록빛으로 물든 마로니에 공원에서 느끼는 여름밤의 정서를 품고 산다. 매미가 우렁차게 울던 여름은 귀뚜라미가 우는 늦여름으로 변해 간다.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선선한 여름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뺨을 기분 좋게 스쳐 웃음이 날 때마다 이런 게 행복이고, 이런 게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void'가 뭔지 알려준 책(김지수, 이어령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얻게된 또다른 깨달음이 있다. 우리의 안에 'mind'가 너무 가득 차 있으면 우리의 영혼은 void를 담지 못한다. 그러나 void를 담을 수 있어야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극 중에 흐르는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는 이렇게 노래한다. 바람만이 알고 있지. 산에 올라 자연이 만들어 낸 void를 느끼고, 그 공허 속에 실려 오는 바람에 살결을 부비며 사는 조와 사이먼은 산에서 내려온 후에도 자신 안에 void를 담고 산다. 아주 잠깐, 그 공허를 만져볼 수 있었던 그 순간의 환희를 평생 기억하며 살아간다. 비록 내가 밤에 걷는 마로니에 공원이 높은 설산은 아닐지라도, 대학로의 여름밤에 부는 바람이 내게 말을 걸 때도 환희가 느껴진다. 바람만이 알고 있는 것. 그래서 정확히 바람이 내게 무어라 말하는지 알 순 없어도 이것만은 정확히 알 수 있다. 이것이 행복. 지금 이 순간이 바로, touching the void.




이런 행복을 알게 해주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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