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눌 유일한 이야기가 야구였던 시절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아 입을 꾹 닫고 있다가도, 봄이 되면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조잘조잘’ 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러다가 서로 핀잔을 주기도, 같이 탄식하기도, 웃기도 했다. 아빠와 저녁마다 같은 채널을 보게 되니 텔레비전 주도권 싸움을 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가끔 그때를 떠올린다. 그러다 내가 야구를 모르던 아주 옛날을 떠올리기도 한다. 오후의 늦은 햇살이 드리운 거실. 선풍기가 180도로 돌며 미지근한 바람을 공평하게 전해주고, 텔레비전에서는 야구 중계 소리가 들린다. 아빠는 신문의 십자말풀이를 풀며 야구를 보는 둥 마는 둥 보다가도 갑자기 ‘그렇지!’ 외치며 안방 관중이 된다. 나는 그 옆에서 정말 오랫동안, 몇 년이 흐르도록 비슷한 질문을 해댔다. 왜 좋아하는 거야? 안타 치면 뭐가 좋은 거야? 왜 공 던지는 사람을 바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충분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늘 묻고 또 물어서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해야만 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빠는 가르치는 데에 소질이 없었다.
이제 나는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아도 누구보다 재미있게 야구를 보는 사람이 됐다. 그러나 야구를 틀어둔 거실에선 텔레비전 속 캐스터의 외침만이 울려 퍼진다. 나는 간간이 기뻐하고, 가끔 혀를 끌끌 차며 조용히 야구를 본다. 스포츠가 주는 희열이 크든 작든 혼자 곱씹으며. 인터넷 속 사람들은 오늘의 경기를 어떻게 봤는지 들여다본다. 아빠와 함께 야구를 보다가 어떤 선수 때문에 함께 크게 웃었다는 글을 본다. 가끔 궁금해진다. 우리도 같이 웃을 수 있었을까.
아무렇지 않게 잘 살다가도 가끔 서글퍼지는 건 그런 것들 때문이다. 늘 가장 필요할 때 없었던 사람이라 결정적인 순간에 없는 건 익숙한데, 야구를 볼 때마저 없다는 걸 실감할 때. 우리 집의 해태 아저씨 없이 혼자 야구를 보고 있다는 걸 자각할 때. 그때마다 인지해야만 하는 수많은 사실들이 아플 때 말이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적막 속에서 야구를 볼 것이다. 외롭고 편안하게. 그 두 개의 감정이 공존하는 저녁이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