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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May 22. 2023

살아남는다는 것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헛된 희망은 희망일까? 그게 나를 살게 한다면 그것이 헛되다 할 수 있을까.     

에바 호프. 이름이 희망인 그녀는 이 동네의 미친년이 된 노파다. 희망 따위 없어 보이는 누더기옷을 입고 악취를 풍기며 괴팍한 말씨로 꼬장을 부리는 그녀는 품에 아주 오래된 원고를 품고 있다. 전세계가 열광하는 베스트 셀러 작가의 미공개 원고를 홀로 간직한 채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며 도서관과 재판을 벌이고 있다. 


호프의 원고 더미는 자신의 능력과 글을 비관하느라 완성된 원고를 세상에 내놓지 못한 작가 요제프 클라인에게서 왔다. 그 이후엔 그의 글이 발하는 빛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베르트가, 베르트를 자신보다 사랑한 마리가 그 글을 지켰다. 마리는 호프의 엄마, 엄마는 호프의 우산, 호프는 엄마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독재와 전쟁은 호프의 우산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이제 엄마의 보물은 딸인 호프가 아니라 원고 같았다. 호프는 엄마의 우산이 되어야 했다. 시대가 쏟아내는 잔혹한 폭력을 온몸으로 막아낸 호프의 몸과 마음엔 생채기 투성이었다. 그래도 빛났다. 빛을 발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지 못하는 원고와 상관없이 호프는 호프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나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사랑이 아니었을 때, 이 시대를 홀로 사는 자신에겐 사랑이 사치라는 걸 깨달았을 때 호프의 빛은 스러졌다. 밤과 겨울만 계속되는 세상에 끊임없이 홀로 선 호프는 부러진 우산 아래 놓인 원고를 품에 안았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 그것뿐인 듯 했다. 딸을 제치고 엄마의 보물이 되어버린 그 원고가.      


호프는 그 원고를 안은 채 늙어갔다. 세상은 호프에게 그 원고를 내놓으라 윽박질렀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원고를 홀로 껴안고 버티던 호프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빛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가시를 세웠다. 그렇게 호프는 이 동네 미친년이 되었다. 지켜야 하는 단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건 민폐일까. 세상의 그 누구도 지켜주지 않았던 어린 여자 아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원고 하나를 품었기로서니, 그걸 자꾸 세상이 내놓으라 하기에 싫다고 꼬장 좀 부렸기로서니. 그게 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만한 미친 짓일까. 


    

인생은 책이 아니라서 그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빠짐없이 읽을 수 없다. 그 와중에 어떤 인생은 많이, 깊게 읽히고 어떤 인생은 적게, 얕게 읽힌다. 혹 어떤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표지조차 들춰지지 못한 채 먼지 속에 덮여 있다. 시대의 시꺼먼 먼지 아래 놓여 있던 호프의 인생은 요제프 클라인의 미발표 원고처럼 그 어떤 독자도 만나지 못한 채 어두운 겨울 뿐인 세월을 났다. 읽히지 않은 원고는 읽히지 않은 호프의 인생과 같았다. ‘원고’는 의인화되어 호프를 향한 노래를 부른다. 누구보다 호프가 자신을 놓아주길 바라며 호프의 인생을 아프게 여겼던 원고 K, 호프가 자신을 놓아주지 못해 고통에 발버둥 치자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버리는 K는 호프의 삶이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호프 안에서 곪아간, 고통과 상처로 점철된 자신이다. 호프는 처음으로 호프를 읽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호프라는 미친 노파의 책장을 넘겨보았다.  

   작품의 마지막 넘버 ‘판결’은 호프의 원고를 도서관에 공개하라는 듯한 판결을 읊는 판사의 문장들로 시작된다. 차가운 판결의 문장은 원고의 목소리와 함께 호프를 향한 따뜻한 위로로 바뀌어 불린다. 사상, 이념 그리고 전쟁처럼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하고 잔인한 것들은 뭘 어찌한 적도 없는 개인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그의 일상을 전쟁으로 만든다. 기쁨, 사랑, 희망 같은 것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나’와 함께 희미해진다. 자신을 빼앗김으로써 모든 희망을 강탈당했던 ‘호프’는 헛되어 보이는 희망을 쥐고 살아남았다. 병든 세상은 내가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다 나를 버리게 만들지만 호프는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끝내 버리지 않았다. 호프를 살게 한 것은 호프 자신이다. 그것이 헛되다 할 수 있을까.


     

‘에바 호프의 인생을 에바 호프에게 되돌려주기로 했다’는 판결과 함께 호프는 웃는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처음으로 돌아본 호프는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해 추운 길 위에 서 있던 나를 마침내 용서한다. 비로소 호프의 발은 집으로 향한다. 그곳엔 호프를 용서한 채 팔 벌려 호프를 반기는 호프가 있다. 그래서 호프의 이름은 호프였다. 아무리 짓밟아도 사라지지 않는 것. 차디찬 겨울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빛. 희망. 희망은 희망을 버리는 법을 모른다. 내내 그곳에 희망으로 존재할 뿐.

 


     

이것이 에바 호프의 이야기였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그의 인생은 살아남았기에 강한 희망이 되어 우리의 마음속을 밝힌다. 누구나의 인생이 그러하듯.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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