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IF/THEN(이프덴)
언젠가는 홀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요즘처럼 강한 압박으로 다가온 날들이 없었다. 사소해보이지만 내 모든 하루를 뒤바꿀 수 있는 일들이 하루 걸러 일어나는 나날들을 지내면서 나는 어서 홀로 서고 싶기도, 영원히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모든 답은 전자에 있다. 내가 철저히 혼자이든, 누군가와 함께이든 나는 나만의 힘으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는 것.
폭풍이 몰아쳤던 1월을 지내고 오랜만에 이프덴을 봤다. 홀로 살아갈 힘을 찾은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었다.
이프덴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선택의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수만 가지 상상을 펼쳐보는 사람이다. 그 상상에서 시작하는 이 극은, 순간의 선택 하나로 리즈가 되기도, 베스가 되기도 하는 엘리자베스의 삶을 통해 한 여성이 살 수 있었던 두 가지 인생을 보여준다. 매우 사소해보였지만 커다란 연쇄 작용으로 인생을 변화시키는 선택들을 나열하며 우리에게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전하는 극 같기도 하다.
그러나 두 가지 삶에 모두 닥쳐온 상실과 고독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이 나은 것이었는지 저울질하는 걸 포기하게 된다. 상실로 인해 무너지고, 고독에 갇혀 몸부림 치는 사람 앞에서 네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았을 거란 말은 힘을 잃는다. 어떤 삶으로도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나라면 그 중 어떤 삶이든 멀쩡히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죽을 만큼 아파하면서도 혼자서도 살아가기 위한 길을 찾는다. 엘리자베스에게 그 과정은 마치 어두운 방에 갇혀 눈을 감고 손을 더듬거리며 문을 찾아야 하는 시간과도 같았을 테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걸어 문을 찾았다. 눈물로 얼룩진 길이라 해도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면 외면하지 않고 걷는 용기를 통해.
베스의 용기는 사랑이라 생각지 못했던 이들과의 관계에 가득 차 있었던 사랑에서 왔다. 다양한 형태로 베스의 삶 곳곳에 깊게 묻어 있던 사랑 덕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깨달은 베스는 그동안 닫아두었던 마음을 열고 자신의 운명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과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리즈의 용기는 두려움과 아픔보다 큰 간절함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민 조쉬와 나눈 사랑에서 왔다. 책임감이 따르는 진실한 사랑이 두려워 확률을 따져가며 조쉬를 밀어냈던 리즈가 조쉬를 떠나보낸 후에도 조쉬와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리즈가 두려워하던 그 진실한 사랑을, 넘치는 책임감을 안고 조쉬와 함께 두려움을 헤쳐나가며 나눈 덕분이었다. 그래서 리즈는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아픔 앞에서도 조쉬와의 만남을 감사히 여긴다. 다시 만나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외친다. 다시 헤어지는 게 두려워 온갖 확률을 따져가며 고민하던 리즈는 이제 어떤 운명도, 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낼 힘을 지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 이 다짐을 노래하던 리즈는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대에 서 있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온 몸을 던져 삶을 진실하게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과 희망이 극장 가득 울려퍼졌다.
네 눈 앞에 나타난 삶에
망설이지마, 뛰어 들어
극장을 나서는 내 손엔 선명하고 뜨거운 희망이 쥐어져있다. 당장 인생을 바꿀 결정적인 선택이나 행동을 할 수 없더라도 나는 안다. 내가 쥔 이 응원이 언젠가 내가 원해서든 강제로든 홀로 서야만 하는 날에 내게 꼭 필요한 손길 중 하나가 되어 나를 일으켜줄 거란 걸.
결국 또 사랑이었다. 진부하게도 어김없이 사랑이다. 하지만 아무리 진부하고 뻔해도 어쩌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국적과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쓰고 사랑을 외치는 것일 테다. 그 사랑이,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무너지고 울더라도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에.
내일은 어떤 일이 또 내 하루를 결정 지을까. 혹시 내 하루가 불행을 향해 고개 돌려도 나는 애써 행복으로 하루를 기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다. 괜히 이곳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무의미한 가정 대신 사랑하고 사랑 받은 기억을 꺼내 오늘을 사랑할 힘을 얻어낼 것이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지 않아도, 운명을 내 건 불꽃 같은 사랑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 속엔 늘 사랑이 있다. 그 어떤 '만약'에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