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싸움이 무서운 겁쟁이였다

50kg의 소년이 만든 비겁한 생존 전략

by 하루

나는 싸움을 못 한다. 아니,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태생적으로 투쟁과는 거리가 먼 생물이었다. 1월생, 이른바 '빠른 년생'으로 학교에 들어간 탓에 늘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 아들, 작아도 씩씩하게 잘할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알았다. '씩씩함'이라는 건 나와는 먼 나라 이야기라는 걸.


체육 시간마다 피구 팀을 나눌 때면 나는 늘 마지막까지 남았다. "에이, OO이는 너희 팀이야." "아니야, 너네가 가져가." 양쪽 주장들이 서로 미루듯 말하는 걸 들으며, 나는 웃는 척했다. 괜찮은 척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그 웃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새삼 느껴졌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키 165cm, 몸무게 48kg. 체육복을 입으면 옷걸이에 걸린 빨랫감처럼 흐느적거렸다. 아이들은 농담처럼, 하지만 농담이 아니게 말했다. "야, 바람 불면 날아가겠다." "OO이 주먹은 모기 물린 것보다 안 아플 듯."


그래서 나는 일찍 깨달았다. 수컷의 세계에서 체급 차이는 곧 서열이라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붙으면 진다.' 100전 100패가 뻔한 싸움에 덤벼드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그래서 나는 생존 전략으로 '회피'를 택했다.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면 "미안해"라며 꼬리를 내렸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내가 참지 뭐" 하고 넘겼다. 친구가 내 물건을 함부로 만져도, 급식실에서 누가 새치기를 해도,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생존 본능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때 정말 싸울 뻔한 적이 있었다. 옆 반 덩치 큰 애가 복도에서 내 어깨를 세게 들이받고 지나갔다. 일부러였다. 나는 휙 돌아서며 "야!"라고 외쳤다. 그 애도 돌아섰다. 우리는 복도 한가운데서 마주 섰다.

그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손은 떨렸으며,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 애는 한 걸음 다가왔고,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몇 초간의 정적. 그 애가 비웃듯 웃으며 돌아섰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승부는 말 한마디 없이 끝났다.


그날 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싸우지 마. 그냥 피해.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야.' 대학생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키 172cm에 몸무게 54kg.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종이 인형' 같은 피지컬이었다. MT에서 술게임을 할 때면 선배들이 장난처럼 내 팔뚝을 잡으며 말했다. "야, 팔뚝이 왜 이렇게 가늘어? 여자애들보다 얇은데?" 다들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숨은 수치심은 아무도 몰랐다.


그 '물리적 회피'의 습관은 어른이 되면서 고스란히 '심리적 회피'로 이어졌다. 나는 갈등이 있는 공간을 병적으로 못 견뎠다. 처음 알아챈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과 MT에서 친구들이 술값 정산 문제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야, 너 왜 자꾸 빠지려고 해?" "아니야, 내가 언제 빠진다고 했어?"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고,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그 순간, 내 심장이 먼저 쪼그라들었다. 마치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세포 하나하나가 "도망쳐!"라고 비명을 질렀다. 손바닥에는 땀이 차고, 숨이 얕아졌으며,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누군가 언성을 높이거나 공기가 차가워지면, 나는 그 공간 자체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늘 도망치거나, 혹은 '자발적 호구'가 되어 상황을 종료시켰다.


그 이후로 패턴은 반복됐다. 친구들끼리 메뉴 문제로 다투면 "야,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거 포기할게. 너네 먹고 싶은 거 먹어."라고 말했고, 조별 과제에서 누군가 프리라이딩을 하면 "그냥 내가 할게. 싸우지 말자."라며 독박을 썼다. 내가 조금 손해 보고, 내가 조금 더 일해서 이 불편한 공기만 사라진다면 그것이 이득이라고 계산했다.


그때 내 입에 본드처럼 붙어 있던 말이 바로 이것이다. "에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이 말을 '배려'라고 포장했다. 나는 평화주의자니까, 내가 어른스러우니까 참는 거라고 위로했다. 친구들도 내게 그렇게 말해줬다. "OO이 너, 진짜 착하다." "너는 성격이 둥글어서 좋아."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뿌듯해했다. '그래, 나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솔직해지자.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갈등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쳐놓은 비겁한 방어막이었다. 나는 '평화'를 원한 게 아니라, 단지 '불편함'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다.


문제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학교에서는 내가 손해 보고 끝나면 그만이었지만, 사회에서의 "좋은 게 좋은 거지"는 나를 '가마니(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보는)'로 만들었다.


첫 직장,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프로젝트 업무 분장 회의에서 팀장이 말했다. "이 파트는 작업량이 좀 많은데, 누가 맡을래?" 정적이 흘렀다. 다들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 무거운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팀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동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회의가 끝나고 선배 한 명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역시." 나는 웃었다. 하지만 그날 밤 야근을 하며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이후로 패턴은 굳어졌다. 업무 분장이 불공평해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떠안았다. 상사가 선 넘는 농담을 해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웃어넘겼다. 거래처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야근으로 때웠다.


갈등을 피하려고 덮어둔 뚜껑 안에서, 내 속은 썩어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을 것이다. 나는 늘 웃으니까. 불만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가짜 평화'였다.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한 전쟁은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억지로 삼킨 말들은 위산과 뒤섞여 속쓰림이 되었고, 하지 못한 거절은 밤마다 이불을 차는 분노가 되었다. 새벽 3시에 잠에서 깨어, 몇 년 전 했어야 했던 대답들을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침대 속 어둠 속에서 반복하는 가상의 대화들. 그 허무함이란. 어느 날, 거울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나한테 좋은 건가?'


남들 기분 맞춰주느라, 싸우기 싫어서 피하느라, 정작 나 자신과는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의 주어는 '나'가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만 참으면)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날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피구 팀을 나누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 작은 아이. 그때 그 아이는 팀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웃어주고, 양보하고, 피하고, 착한 아이가 되면 언젠가는 먼저 뽑힐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마지막에 남아 있었다. 다만 이제는 피구공 대신 업무를, 팀 대신 관계를, 운동장 대신 회사를 배경으로 같은 드라마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저 갈등이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였다. 50kg의 왜소한 몸으로 싸움을 피했던 그 소년이, 30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마음의 근육을 키우지 못해 세상의 모든 갈등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이제 나는 이 말이 '폭력'으로 들린다. 갈등을 해결하는 정당한 과정을 생략하고, 가장 약하고 만만한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조용한 폭력. 그리고 그 폭력에 가장 앞장서서 동조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나는 이제 다투기로 했다. 주먹질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내 몫을 지키기 위해, 부당함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불편한 공기'를 견디는 근육을 키우겠다는 뜻이다. "아니요. 그건 저한테 좋지 않습니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둥글게만 살았던 내 세상에 모서리가 생길 것이다. 누군가는 찔리고, 누군가는 불편해하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남한테만 좋은 사람이 되느라 나한테 나쁜 사람이 되는 짓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50kg의 왜소한 소년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 소년이 평생 피했던 싸움을, 이제는 시작할 때가 됐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싸움.